KILL YOUR DARLINGS


로제타

TAP

 

 

 

  황현진은 늘 주인공이었다. 그것은 그의 유전적인 탁월함, 어느 집단에서나 잘 비집고 들어가는 성격, 그리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에 대한 장기간의 경험이 축적시킨 자신감 덕이었다. 사랑은 돈과 같다. 사랑받는 법을 아는 이는 무한한 애정의 샘을 지닌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황현진을 사랑했다는 것은 아니고, 대개는 그러했다는 뜻이다. 머리가 커 감에 따라 발달해온 사회성은 그 미움의 빈도를 낮추는 것에 일조했다. 능력껏 해결할 수 없는 비호감의 수치는 그런대로 두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을 한참 상쇄할 만큼 그는 또래 집단에서 관심을 독식하는 애였기 때문이다.

 

  세상은 넓고, 자신이 대단히 특출 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실감한 것은 한참 뒤였다. 공부에 쏟을 열정은 없었으나, 내신성적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틀 정도 각을 잡고 벼락치면 꼴통 인문고에서 3등급 언저리에 턱걸이로 메달리는 것은 현진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해 물수능에서 5로 줄을 세운 성적표를 받고, 최저탈로 불합격을 확신하고, 고3 담임에게 현재 성적으로 노려 볼만하다는, 머리털 난 이래 처음 들어본 대학의 이름들을 들었을 땐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키즈모델을 해보라거나, 아역배우 오디션이라도 봐 보자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중고등학생 즈음에도 간간히 소속사 명함을 받곤 했다. 이제 와서 아이돌 같은 걸 하기엔 나이가 많았고 모델을 하기엔 키스펙이 좀 후달렸다. 그래서 현진이 학교 앞에서 나눠주던 웬 신생 연기학원의 전단지를 받았을 땐 이거다, 싶었던 것이다. 배우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배우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뿐이다. 그 길로 엄마를 졸라서 연영 입시 학원에 등록했다. 입시학원 원장은 현진의 내신 성적과 와꾸를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한 모양이었다. 당장에 한달 남짓 남은 올해 정시 입시 문턱에 비벼보자고 그를 꼬셨다. 그렇게 연극 식 발성을 배우고, 발음 교정을 받고(마음처럼 잘 되지는 않았다), 고전극 대본을 수십개씩 암기했다. 확실히 노래는 남들만 못했다. 얘들은 왜 가수가 아니라 배우를 준비하나 싶을 정도로 노래를 하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코노에서 좀 날리던 고등학생에게 뮤지컬 넘버들은 대체로 음역폭이 넓고 요령이 필요했다. 그래도 춤은 꽤 빠릿하게 추는 편이었으므로, 자유 특기로는 무용을 준비했다. 이 노력으로 미리미리 공부를 할 걸 하고 후회하던 시간들이었다. 괴팍한 무용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눈물을 쏙 뺀 보람이 있게도, 현진은 그 해 원서를 넣었던 경기 권 예대의 문을 닫고 들어갔다.

 

 

 

 

  “올해 애들 중에 네가 제일 잘생겼더라. 너도 알지?”

  “아, 그 정돈 아닌데, 그래도 감사합니다아...”

  “얘는 되도 않는 겸손이네.”

  “아녜요. 진짜요.”

 

  신환회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선배들의 칭찬을 주워섬기며, 현진은 이것이 자신의 길임을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다들 현진 더러 신입기에서 제일 봐줄 만하다고, 잘생겼다고 했다. 그러니 현진은 검증받은 이들 중에서도 특별한 것이 아닌가? 살면서 이쯤 되면 콧대가 꺾여야 마땅한 시점이었는데, 현진은 여전히 그런 패배감을 맛보지 못했다.

 

  그런데 사실 황현진 같은 건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고, 천재도 뭣도 아니지 않느냐고 면전에 대고 처음으로 말해주었던 이가 이민호였으니, 그가 현진에게 아주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야, 그만 뺀질거려. 죽여버린다?”

  “네? 안 뺀질거렸는데요?”

  “뭘 안 뺀질거려? 너 대본도 똑바로 안 읽어본 거 내가 모를 것 같냐?”

 

  이민호와는 기말 과제로 2인 1조 영상물을 제출해야 하는 수업에서 만났다. 처음 이민호를 봤을 때 현진은 저런 사람이 연출과라고? 배우가 아니고? 하는 생각을 했더란다. 연기과가 아니라는 게 안 믿기게끔 화려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지금 당장 그를 닮은 배우 몇을 꼽아보라면 흐릿하게 떠오르는 인물이 한 손을 훌쩍 넘었다. 소위 말하는 잘 생겼는데 미형인 느낌이 드는 ‘잘생쁜’ 얼굴로 선선히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하던 이가 이민호다. 잘 해봐요, 선배라고 너무 불편하게 생각 말고 좋은 거 한번 해봅시다. 시원시원한 말투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키는 저보다 약간 작았지만 확실히 어른 같은 느낌이 있어 듬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느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불과 지난주, 고작 일주일만에 이민호는 황현진 인생 최대의 고난이 되었다.

 

  황현진의 신입생 첫 해는 다소 엉망이었다. 현진 더러 미모가 발군이라고 추켜세워주던 선배들은 이게 다 경험이고 남는 것이 인맥이라며 그를 오만 자리에 불러냈다. 현장작업을 자주 하는 교수나, 인디영화 쪽에선 꽤 알아주는 감독인 학교선배라거나, 작은 뮤직비디오 제작회사에서 일한다는 사람들이 있는 유의미한 자리일 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5년에서6년 위의 졸업반(그러나 영원히 졸업할 것 같지 않은) 선배들이 낀 부어라 마셔라를 목적으로 하는 술자리였다. 가끔은수저를 마이크 삼아 노래도 뽑아야 했고, 잘생겼다는 말에 기대하고 왔더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는 말이나, 얼굴빨로입학한 것 같다는 류의 모욕에도 슬슬 웃어 넘기는 재주가 생겼다. 그렇게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혼란한 술자리로 밤을 지새우고 나면 예상 외로 버거운 스케줄이 그를 기다렸다. 표현 강의 와중에 교수의 호통을 자장가 삼아 졸기도 할 정도였으니, 현진의 자기관리가 대단히 실패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강의 중에 장면 연기나 짧은 독백을 읊는 일은 잦았지만,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는 수업은 하나뿐이었다. 본래는 고학년 전공이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선택 전공으로 바뀐 뒤 일부 신입생들의 시간표에 구겨 넣어진 강의였다. 개중에 눈치 빠른 녀석들은 첫 주에 드랍을 때리고 수업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현진은 그 정도 요령이나 정신머리까지 갖추진 못한 이였으므로. 꼼짝없이 강의를 들었고, 교수가 임의로 짜준 조에서 하나뿐인 일학년이자 연기과 학생이 되었다.

 

  그러니 이민호가 지적한 ‘대본도 똑바로 읽어보지 않은 것‘ 은 사실이었다. 캐릭터를 분석하고 대본을 외워 올 정도의 기력이 모자랐다. 현진이라고 다른 과목 시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과제물 비중이 큰 이 강의는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어차피 선택 전공의 과제 같은 건 대충해서 제출하는 것들이 반 이상이었다. 대본 그대로 배우가 완성도 있게 연기를 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고, 결과적으로는 연기자의 입맛에 맞춰 대사나 감정선이 편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래서 좀 소홀하게 굴었던 것은 사실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곡을 찌르는 이민호에 황현진은 괜히 좀 억울한 기분이 들고 속이 베베 꼬였다.

 

  “아니 결국 대사 읊는 건 전데, 연기 내가 혼자 하는데? 제가 안 맞는다고 느끼면 좀 수정하고 해 주실 수 있는 거 아녜요? 아닌가?“

 

  황현진은 연영과 입시를 하면서 다소 과장된 톤으로 화를 내는 사람이 됐다. 이건 좀 예술충들이 공유하는 공동의 정서였다. 이민호가 ‘과하게’ 지랄하며 면전에 욕을 박은 이유 역시도 그가 예술충이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이 구상한 무언가를 황현진을 통해 관철시키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었을 테니. 거 씨발, 졸업 영화도 아니고 기말 대체 과제 하나로 되게 화내네?

 

  “어, 안 되겠는데? 너 뭐 몇 십년 짬 먹은 배우니? 근성 있게 못하겠으면 빨리 관두지 그래.“

 

  황현진의 삔또가 나간 지점이었다. 이래서 얼굴값 하는 애들이 안 된다며, 쉬워 보이니까, 얼굴은 좀 생겼으니까 대충 입시하고 운 좋게 입학한 애들은 안 봐도 뻔하다고 비꼬던 한 선배의 얼굴과 이민호의 것이 겹쳐 보였다. 제가 황현진에 대해 무얼 안다고 관둬라 마라 하느냔 말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민호의 말이 다소 꼰스럽긴 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는데, 황현진한테 호의적으로 군 것 치고 속으로 얼마나 편견 가득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지 가늠하게 되다 보니 그런 정상적인 사고가 잘 안 됐다.

 

  굳이 둘 중에 더 어른인 쪽이 누구였느냐 따지자면, 그것은 분명 이민호였다. 씩씩대며 숨을 참던 현진을 지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던 이민호는 한숨을 터트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일단 내가 시작한 거니 사과는 할게, 말 심하게 한 건 미안하다.

 

  “근데 너가… 뭐 아니라고 하면 나도 더 따질 생각은 없긴 한데, 좀 성의 없게 군 건 맞지 않냐?”

 

  이런 류의 치킨게임은 모두가 알다시피 먼저 한수 접고 들어가는 쪽이 사실상 큰 그림의 승자였다. 현진이 말 없이 숨소리를 누그러트리며 꽉 물었던 이를 느슨하게 풀어놓자 그가 덧붙였다. 너가 스스로를 얼마나 고평가하는지는 몰라도, 경험상 연기에는 천재가 없어. 보고 익혀서 쌓아놓은 만큼 나오는 일이라고.

그래서 말인데, 나랑 여기에 시간 좀 쏟자. 그럼 분명 넌 괜찮은 배우같이 나올거야. 확실히 생각해보면 이민호는 그때 좀 어른이었던 것 같다. 뒤늦게 그 날의 일을 상기했을 때 이민호는 쏟아붓고 나니 차분해져서 그랬다, 고 말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황현진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이민호가 좋아졌던 것이다. 여러모로 그의 인생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는 놀라운 이였기 때문이다.

 

 

***

 

 

  이민호는 누군가를 알기 위해선 시간을 쏟을 필요성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최소 삼 개월은 부대끼며 작품을 만들어야 할 이였는데, 이민호는 황현진에 대해 아는 것이 그닥 없었다. 얼굴이 제법 번드르르하게 잘 생겼고, 좀 한량 같은 구석이 있었지만, 앞으로 고꾸라져 졸지라도 수업은 꼬박꼬박 출석을 했다. 선배나 연장자에게는 깍듯하게 구는 듯해도 먼젓번에 뻗대던 것을 보면 본래는 한 성깔 하지 싶었고, 조금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나니 적당히 애교스럽게 넘어가는 순간들을 체감하면서 사회성 끝내주네 라는 생각을 했다. 그 날의 말싸움으로부터 2주 남짓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민호는황현진과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함께했다. 황현진을 ‘잘’ 찍어내려면 ‘잘’ 아는 것이 먼저였다. 당최가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순간에 보는 이를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지. 어떤 연기를 할 수 있으며, 가진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을지 등등…

 

  “현진아.”

  “예, 형.”

  “넌 어쩌다 연기과에… 온 거니?”

  “형도 제가 연기랑은 안 맞는 것 같으신 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너 가끔 보면 뭐 딱히 연기를 하고 싶어 보이진 않길래. 여느 때와 같이 학교 인근의 술집에서 과 선배들과의 술자리를 가지던 중이었다. 마침 자리에서 도망칠 각을 재고 있던 황현진은 어디냐는 민호의 연락에 과제를 핑계로 술집을 벗어났다. 품이 큰 과 돕바에 묻힌 이민호가 문간에서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얼굴이 조금 벌개진 황현진을 보고 그가 건넨 첫마디는

 

  “팔자 개 좋네 현진아.“

 

  였고, 황현진은 보자마자 꼽부터 준다며 툴툴댔다. 이민호의 그리 곱지 못한 말 본새에 적응한지는 오래였을텐데도꼭 한번씩 서운해 하고는 했다. 양 뺨에 적당히 홍조가 올라서는 알딸딸 한지 조금 비틀거렸다. 취한 황현진에게 포카리한 병을 사서 들려준 민호는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에 자리하고 앉아 묻는다. 너는 뭐가 좋아서 연기과에 들어왔느냐고.

 

  “글쎄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나.”

  “뭐 얼굴 보면 잘 어울리기야 하지.”

  “난 형 처음 봤을 때 형이 진짜 연기과 같이 생겼다고 생각했어요.“

  “미안한데 뭐 나올 통장 없다 나는.”

  “진심인데… 그럼 형은?“

  ”나? 나 뭐?“

  ”형은 왜 연출과 갔는데?“

 

  그러더니 은근슬쩍 말을 툭 놨다. 이민호는 손쉽게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기꺼이 눈감아 주기로 한다. 역질문에 이민호는 말끝을 흐린다. 그냥 뭐, 고딩 때 방송부였어서, 생기부에 있는 게 그거 한 줄이라가지고... 나도 그럭저럭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이거 하면 재밌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했지 뭐.

 

  “시시하다. 원래 연출과 애들이랑 말하면 좋아하는 감독 얘기 같은 거 하던데.“

  ”지는.“

 

 파란 플라스틱 테이블에 납작 엎드린 황현진이 웅얼거렸다. 그러게, 우리 둘 다 되게 시시하네. 황현진은 테이블에 이마를 붙였다 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원해서 기분이 좋은데, 담배 냄새 나서 역하다. 황현진은 후각이 좀 예민한 편인 것 같았다. 답지 않게. 민호는 대답 없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 끝에 차갑게 식은 휴대폰이 걸렸다. 솔직하게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황현진을 사진첩에 담아 놓고 싶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줄 땐 꽤 매력적인 피사체인 것 같다는 생각을 민호는 한다.

 

  “집에 가서 자라. 일어나.”

  “형, 나 집 여기서 대따 멀어.”

  “그거는 내 알 바가 아니고.”

  “요새 새벽 2시까지 택시 할증 비싸진 거 알아? 내가 형 땜에 자리에서 일찍 나와가지고, 야간 택시 삼십퍼 더 내고 타야 되는데……“

  “아우! 거 참 재워 달라는 말 존나 돌려서 하네.”

 

  비틀대는 성인 남성의 목덜미를 붙잡아 끌고 돌아왔다. 자취방에 도착한 민호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현진을 신발장에 반쯤 내동댕이쳤다. 턱에 엉덩이를 부딪힌 황현진이 울먹였다. 아파 진짜. 민호는 운동화를 대충 벗어 던지며 널브러진 황현진을 넘어 휘적휘적 집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대신 같은 가격대의 자취방들 보다 넓은 이민호의 자취방은 그 나름의 장점이 있었지만, 겨울엔 놀랍도록 외풍에 취약했다. 남자끼린데 뭐 어때, 암만 보일러 떼준대도 바닥에서 재웠다간 입 돌아갈 것 같은데 라는 이유로 침대 한 켠을 내어주고 나서 보니 슈퍼 싱글매트리스는 남자 둘이 눕기엔 자리가 비좁았다.

 

  “형, 나 그냥 바닥에서 자도 되는데…”

  “진지하게 고민 중이니까 말 시키지마.“

  “그쪽으로 등 돌리고 자다가 형이 떨어질 것 같애서그러지.“

  “니 얼굴에 토해도 되면 마주보고 자고.“

  ”술 먹은 건 난데 왜 형이 토한다고 그러냐?“

 

  자기는 원래 왼쪽으로 누워서 자야 잠이 온다며, 굳이 남자 둘이 징그럽게 마주보고 잘 것을 주장하던 황현진은 잠든 지 한시간 만에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우며 뒤척였다. 뜬눈으로 남겨진 민호는 미지근하게 발열하는 남의 등을 쳐다보는 기분이 더러워져서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웠다. 이제는 맞닿은 한쪽 팔이 과하게 뜨거워서 신경 쓰였다. 발정이 났나 씨빨… 이민호는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이민호는 황현진이 인간적으로 싫지 않았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들 가운데 좋은 건 귀했고, 잃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민호가 먼저 선을 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호르몬에 의한 화학 작용이다. 이민호가 참기를 선택한다고 해서, 뇌에서 분출되는 도파민이니, 엔도르핀이니 하는 것들이 터져 나오기를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보기보다 괜찮은 구석이 많은 녀석이었고, 걔를 프레임에 담으면 담을수록 아주 조금씩 더 좋아하게 됐다. 촬영본을 편집하는 것을 들여다보던 이민호의 동기가 왜 인지 기분이 더러울 정도로 예쁘게찍어 놨다고할 때, 그 즈음에서 이민호는 변화한 감정의 스테이터스에 적응했다. 평범하게 황현진이 좋아졌다. 그것도 좀 참기 힘들 정도로.

 

  “근데 직전에 형을 만난 게 진짜 다행인 것 같애.”

  “어 뭐, 난 별로? 모르겠는데? 우리 좋았냐?“

  ”에이, 같이 있을 때 재밌었으면서 아닌 척하긴. 민호 형 부끄럼쟁이.“

 

  반쯤은 이민호가 원하던 바였다. 여러모로 좆됐음을 실감한 황현진이 덜컥 받아 둔 입대 일자가 코앞이랬다. 과제 제출은 이민호가 하기로 했고, 기말 시험이 끝난 바로 다음 날 입대가 예정된 황현진은 사실상 종강하자마자 군대에 감금 되는 것이었다. 머리를 깎아 놓은 꼴이 결코 어울린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머리 꼬라지가 민망하답시고 볼 캡을 푹 눌러 놓은 얼굴은 정말이지 힘들 정도로 꽤 귀여웠다.

 

  “인편 써조.”

  “싫어.”

  “안 써주면 휴가 받자마자 나와서 복수할 거야.”

  “해보던가. 할 수 있으면.“

  “형한테 평생 서운해 할 거라고.”

  “그것 참 마음에 드는 결과네.”

 

  황현진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민호는 안다. 사실은 개의치 않아 할 것이라는 걸. 그래서 뱉어놓고 내심 상처받은 것은 이민호였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이후 이민호는 뱉은 말을 모두 지켰다. 과제를 무사히 제출했고, 황현진에게 나중에 성적 확인하라는 카톡 한줄을 남긴것을 끝으로, 인편 같은 것은 써주지 않았다. 훈련소에서 나온 현진에게 [진짜로 인편 안 썼더라ㅡㅡ] 같은 카톡이 왔어도씹었다. 그 사이 이민호는 소규모 드라마 제작사의 막내 피디로 입사하면서 새벽 야근이 기본인 삶이 되었고, 자연히 휴가 때 만나자는 제안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밀어낸 것은 아니었으나, 원래가 붙어있지 않았던 조각처럼 떨어져 나갔다.

 

  황현진의 대한 생각을 할 시간이 없을 만치 바빴다. 새벽 다섯시에 눈을 붙이면 다행인 날들이었다.그렇게 일 년 정도를 보내고 나니까자연히 감정이라는 것도 사그라들었다. 간간히 인스타에 휴가를 나온 듯해 보이는 사진들이 올라왔다. 꽤 잘 지내는 듯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홀린 듯이 시간이 흘러서 이민호가 신입 딱지를 떼고,누군가의 선임이 되었을 즈음, 황현진도 시기에 맞추어 제대했다. 휴가 때마다 보이던 동기 여자애의 사진이 걔의 피드 한 편을 차지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주, 아주, 아주 자연스러운 결말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재회는 정말이지 달갑지 않았다고.

 

  “이민호? 민호 형?”

 

  형 이 팀에서 일해요? 몇 년이 더 흘렀고,이민호가 크레딧 초반에 이름을 올리는 급으론 머리를 키운 5년차 조연출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모기업 방송사에서 새롭게 론칭 한다는 모 연애프로그램 현장에 지원 인력으로 차출된 이민호는 황현진을 만났다. 그 사이 현진은 몇 개의 웹드라마에 출연했고, 인스타 팔로워가 제법 불어났으며, 작은 배우 소속사에 들어갔다.

 

  “와 형, 이거 진짜 얼마만이에요.너무 오랜만인데.그쵸?”

 

  주변에 모여 있던 팀원들이 이민호더러 원래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제가 학교 후배예요. 대답한 것은 황현진이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아, 제가 이런 프로는 완전 처음이라 많이 지적해주세요. 여전히 사회성이 무척이나 좋았고, 호감 사는 법을 잘 알았다. 급하게 땜빵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인상 좋네요,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트렌디한 미남이지 않아요? 함께 지원을 나온 후배가 넌지시 물었다. 선배랑 친하셨어요? 이민호는 대답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친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짧게 알았는데? 친했었나?

 

“그냥, 적당히 알았었는데요.”

“엄청 반가워하길래 친한 줄 알았죠.”

“에이, 누구든 그러죠. 이쪽에선 안 친해도 다 친했던 척하고 그러잖아?”

“하긴 저도 현장 가면 그래요.”

“응, 우리도 들어가죠? 날도 추운데.”

 

  민호는 하수구 언저리에 다 태운 꽁초를 던지며 문뜩 생각했다. 담배 냄새 싫어하지 않았었나? 슬쩍 소매에 코를 박아본다. 입사 때 사수에게 배운 뒤로는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으니 이게 담배 쩐내인지 그냥 옷장 냄새인지 분간이 잘 안됐다. 고개를 갸웃하던 이민호가 별안간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는 거지 대체. 신경 쓸 이유 같은 게 남아 있을 리 없었는데 사서 뻘 짓이었다.

 

 

***

 

 

  황현진은 이민호를 떠올리면 자연히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저 형은 분명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말하지 않을까? 그를 향한 은근한 배려와, 그럴 사람으론 도통 보이지 않는데 분명 섬세하게 다루어 주는 부분들이 현진으로 하여금 어떤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이민호에게 특별해마지 않는 사람일 것이라는.

 

  그러나 어떤 확신들은 아주 손쉽게 깨어지는 법이었다. 이민호와 멀어진 경위는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그렇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살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럼에도 잘 잊히지 않았다. 밤에 누우면 종종 이민호와 보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미움받을 짓을 한 게 대체 무엇인지 자꾸만 되짚어보게 됐다. 백 번 양보해서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쳐도, 이렇게 잠적해버리는 건 이상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바쁘게 지낼 때는 전혀 생각나지 않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민호는 황현진의 기억에서 튀어나온 작은 거스러미 같은 것이었다. 눈 여겨보지 않으면 신경 쓰이지 않다가, 인지한 순간부터는 미친듯이 거슬리는 과거.

 

  어떤 의미에서 현진은 분명 행운아였다. 마주하고 보니 별것 아니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었으니까. 우리가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만 그랬나하는 작은 서운함마저 털어버릴 기회였다.

 

 “오늘 촬영 수고하셨어요.”

 “네, 다음에 또 봬요. 잘 들어가시고요.”

 “존대 안 하셔도 됩니다, 아시면서.”

 

  그리고 현진은 슬쩍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형 번호 바꿨죠? 연락해도 되면 나 다시 주세요. 이민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장난스런 한숨을 크게 내쉬며 휴대폰을 건네 받았다. 아, 원래 이렇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시면 안되세요. 피곤하네 진짜. 황현진은 재치 있게 받아 치는 재주가 넘치지는 못했으므로 활짝 웃어 보이고 말았다. 그리고는 내심 안도했다. 이민호로부터 완전히 밀어내진 것이 아님을 확인 받으며. 어쩔 수 없었던 상황 탓이라 생각할 여지를 허락 받으며 말이다.

 

 

 

 

  연락은 아주 드물게 이루어졌다. 이민호는 본래 소속된 제작팀이 따로 있었고, 그 날은 급히 현장 파견을 나온 것이라고 했다. 며칠 연락 좀 했다고 도로 말투가 편해져, 아쉽다ㅋㅋ 형이 내 빽 해줘야 되는데, 같은 쓰잘데 없는 소리도 곧잘 하게 되었다.

 

  이민호는 꽤 바빴고, 띄엄띄엄 오는 답장들은 대충 휘갈겼을 것이 분명한 자음이나 이모티콘이 태반이었지만 황현진의 제안들을 거절하진 않았다. 가끔 만나 맥주 한잔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됐다는 뜻이다. 장소는 대개 황현진이나 이민호의 집이었다. 블라인드 데이트를 컨셉으로 한 연애프로에서 현진이 꽤나 인기를 끌며 유명세가 올라간 탓이었다. 요 근래에는 넷플릭스 제작 지원을 낀 지상파 드라마에서 의미 있는 조연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고, 여러모로 공인임을 실감하던 차였다.

 

  “전엔 형 집에서 꽤 자주 잤던 것 같은데, 그치.”

  “누가보면 내가 재워준 줄 알겠네.”

  “형이 재워준 거지 그럼 뭐냐?”

  “니가 기어들어와서 잔 거야.”

 

  대화 사이에는 가끔 공백이 생겼다. 둘 다 은연 중에 연락하지 않고 살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길 꺼려했다. 이민호는 대학시절 얘기만 나와도 은근히 화제를 돌리는 게 티가 났다.

 

  “너 근데 뭐, 요새는 만나는 사람 없어? 자꾸 내가 자고 가도 돼?”

  “언제는 있었던 것처럼 말을 하네? 형이 봤냐?”

  “없었던 게 이상하거든.”

  “길게 만난 사람 없어.. 진짜루. 그리고 그렇게 만나기엔 내 앞가림도 못했는데 뭐.”

  “이젠 아니잖아. 실컷 만나면 되겠네.”

 

  이민호의 말에 황현진은 괜히 꽁한 기분을 느끼며 대꾸했다. 나랑 놀아주기 되게 귀찮으신가보네요. 이민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부정도 안 하는 것은 너무한 거 아닌가? 현진은 고개를 들어 이민호의 표정을 살핀다. 이민호는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개는 잘 갈무리하지만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당혹스러운 얼굴. 황현진을 마주할 때면 이전에도 종종 짓고는 하던 표정을.

 

  “무슨 생각해?”

  “엉?”

  “형 그런 얼굴 할 때, 무슨 생각하는 거냐고.”

  “내가 무슨 표정인데?”

 

  이민호가 의아하게 되묻는다. 뭔가 말 하고 싶은데, 할 말을 못 찾는 것 같은 표정. 가끔 나랑 대화하면 하는 거.이민호는 대개 그러하듯 웃음으로 때워 넘기려 했다.

 

  “형 나 귀찮아? 피해? 아니, 피하고 싶어?”

 

  황현진은 참지 못하고 직구를 내던졌다. 이민호는 느닷없는 물음에 눈만 끔벅였다. 잠깐의 정적 후에 답이 돌아왔다. 아닌데 그런 거?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물음은 꼬리를 물었다. 머리 속이 뒤죽박죽으로 꼬여들어가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끼며 현진이 캐물었다. 그럼 번호 왜 바꿨어? 바꾸고 왜 안 알려주는데? 내가 그때 현장에서 아는 척 안 했으면 걍 평생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 했어? 황현진은 여전히 튀어나오는 충동을 어른스럽게 억누르는 방법을 잘 터득하지 못했다.

 

  “진정하고 하나씩 물어보지? 내가 지금 어디 가는 거 아닌데 왜 그래.”

 

  그러니까 이런 부분에서 이민호는 가끔 너무 어른스럽게 황현진을 다룰 줄 안다는 거였다. 대개의 선명한 기억들이 그러하듯, 이민호의 존재는 현진에게 늘 새로운 충격이었기 때문에 참지 못하고 내뱉는 것이다.

 

  충동적으로.

 

  “내가 형 좋아했어.”

 

  뱉고보니 생각보다 더 진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오래 동안이나 괴로워 했을 리가 없었다…

 

  “말 하진 못했는데, 내가 형을 진짜 좀 좋아했던 것 같거든, 그래서…”

  “왜 말 안 했는데?”

 

  그렇게 묻는 이민호는 궁금하긴 커녕 심드렁해 보일 지경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눈은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티가 팍 났다. 그래서 현진은 조금 안심했다. 이민호에게 이건 아무것도 아닌 말이 아니었으니까.

 

  “난 누구한테 그런 말 먼저 해본 적 없으니까그런 생각 안 해봤단 말이야.”

  “누군 하고 사는 줄 알아?”

 

  끝이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아니 왜 울지? 이민호가? 현진은 주섬주섬 바닥에 굴러다니던 휴지를 뜯어 건네며 덩달아 처량해진다.

 

  “근데 왜 울고 그래……”

  “니가 한심하고, 재수 없어서. 속 터져서 그런다 왜.”

 

  살짝 코 먹은 소리로 이민호가 덧붙였다.

 

  그리고 나도야, 멍청아.

 

 

***

 

 

  과거형의 감정을 고백한다는 것은 조금 슬펐다. 이런 감정들은 완결되지 못했을 뿐 지속되는것이 아니었으므로, 강제로 끄집어내진 것을 되새긴다고 해서 완전하게 사랑하게 될 리가 없었는 것이었기에.

 

  그래도 황현진아,

 

  우리가 서로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남는 거라구.

 

  그건 한참이 지난 후에도, 몇 백, 몇 천 킬로미터를 떨어져 있어도, 우리를 가끔 공명 하는 사실이 될 테니까.

 

 

***

 

 

 

 

  2019년, 12월 23일의 이민호는 영상의 마지막 자막을 입힌다.

 

  모든 물체는 고유 주파수(Natural Frequency)를 가진다

  일순간 동일한 파장대를 마주한 물체는 반드시 공명한다

  그 찰나가 아무리 짧을 지라도,

  고유한 떨림은 결국 내재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