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소재 주의
*작품 내 등장하는 지명과 인물, 사건은 실제와 무관합니다.
prologue.
종교란 무엇인가. 한때 사회 진화론자들은 그것을 미숙한 과학이며 무지와 착오에서 비롯된 그릇된 인식 체계로 정의했다. 그러나 너무 똑똑한 그들이 간과한 한 가지 명징한 사실이 있었다. 무지와 착오는 인간과 누구보다 가깝다는 것이다.
종교를 종교로 만드는 본질은 믿음에서 기원한다.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믿음, 내세에 대한 믿음. 다시 말해 평범한 삶에서 특별한 신성으로 분리되고자 하는 개인이 가진 욕망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 믿음은 또다시 신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 통합하는 기능을 훌륭히 수행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민호가 가르쳐준 말이다.
"이지, 뭐해."
"일기 써."
"또 황현진이랑 내 욕 쓰고 있어?"
"오빠 자의식 과잉이야."
"네네, 얼른 예배 갈 준비나 하시죠."
외동의 장점은 그렇다. 나누는 것으로 싸울 일이 없다. 소유는 완전하다는 관념은 아직 머리가 말랑했을 시절부터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나는 도통 나의 소유물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100%의 소유에 익숙한 내게 이민호는 처음으로 손에 들어온 물질 아닌 타인이었다.
인사하렴, 지호야.
누구예요?
앞으로 지호 지켜줄 사람이야. 민호 오빠라고 불러.
......안녕.
안녕이라는 인사를 그가 먼저 건넸나. 모스크바에서 200km 정도 떨어진 도시인 블라디미르로 이주한 이후,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 처음 만난 동양인이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러시아의 날씨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전혀 안녕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얗게 질린, 나와 닮은 그 어린 동양인의 얼굴이 어색해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시절의 해외 입양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어쩌면 아주 커다란 가구를 배송받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나의 부모는 이 세상에 아무 연고가 없는 아이를 입양하길 원했다. 본인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지켜줄 이 하나 없는 생명. 이민호는 고아는 아니었지만 어린 엄마가 교회 앞에 그 애를 버리고 갔다는 이야기가 낡은 입양 증명서에 한 줄로 적혀있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부모의 호적 밑으로 들어왔다. 나의 이름이 이지호라서 그의 이름은 이민호가 되었다. 그는 나의 이름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형제로 자랐다.
어떻게 자기 자식을 버리지?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
오빠, 절대로 그런 사람 찾으러 가면 안 돼.
언젠가 한 번은 그런 얘기를 이민호 앞에서 했다가 우리는 삼 일 동안이나 말을 못 했다. 미안해 오빠. 라는 말을 해도 이민호가 나를 용서하지 않았던 건 처음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푸딩을 뺏어 먹어도 내겐 한 번도 화낸 적 없던 오빠가 그렇게 차갑고 무서운 얼굴을 한 건 본 적 없어서 나는 아주 많이 울었다. 오빠가 자기를 버린 사람을 찾으러 가겠다고, 그래서 나를 떠나겠다고 할까봐 무서웠을 뿐인데. 오빠의 방문 앞에서 울먹이며 그런 얘기를 실토하고 나서야 이민호는 이전처럼 다시 잠들기 전 내 방에서 나를 재워주었다.
이지야, 책임은 너무 크고 무거워.
응?
.....그러니까 그럴 수 있어.
응 맞아, 나도 알아.
거짓말. 넌 모를걸.
아냐, 오빠는 맨날 나 잘 때까지 옆에 지켜주잖아.
......
오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 엄청, 엄청 어둡고 무서운데도. 그런 거 아냐?
그 말에 이민호는 아무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나 쓱쓱 쓰다듬었다.
아마 이민호에게도 새로 생긴 여동생이 무척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일곱 살이었을 때 그도 겨우 열 살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는 나를 진짜 동생처럼 대해주었다. 언젠가 부모는 그에게 너무 정을 주지 말라고 했다. 결국 믿음이 배반되는 순간의 제물이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하며 그랬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외로웠던 순간마다 내 곁을 지켜준 건 이민호였다. 나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게 진짜 가족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
"망할, 러시아."
"오늘은 진짜 폭설이네."
눈으로 뒤덮인 도로를 멀리서 보면 어디까지가 길이고 어디부터가 교회 건물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성가대의 낮은 합창 소리를 뒤로 하고 우리는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걸었다.
"사기 사이즈도 적당히 쳐야지, 구원받기 전에 다 얼어 뒤지겠다."
나와 이민호의 부모는 비범한 멍청이들로 무려 러시아에 이름을 떨친 사이비 교주였다. 아 코리안 맞다. 그런데 왜 러시아냐. 추운 나라 애들이 의지할 데가 더 필요하지 않겠냐. 그 기가 막힌 논리가 국경을 넘은 사기극의 시작이었다. 문제는 그 논리가 정말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 돌아다니는 가짜 예수를 다 합치면 크렘린광장이 비좁다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돌았다.
이 도시에는 유난히 많은 수도원과 성당들이 세워져 있었다. 겉으로 보면 새하얀 색으로 칠해진 외벽과 하늘을 찌르는 금빛 종탑의 외형들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종교에 기반한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는 일관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출처 모를 이방인의 종교 하나쯤 섞여 들어가도 영 이질적이지 않았으리라.
너무 신실했던 나머지 망한 교회 하나를 사들였다 그랬다. 근본 없는 한국의 사이비 종교, 최후의 성서 교회가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물을 차지하게 된 사유였다. 우리 교회 지붕 꼭대기에 매달린 십자가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빛났다. 조명에 반사된 십자가의 광명이 멈추지 않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매일 영원히 빛나는 십자가에 구원을 빌고자 찾아오는 신자들을 위한 기도를 준비해야 했다.
열성 신도의 대부분은 자신의 터전을 떠나 교회 근처에 무리를 지어 살았다. 마을 뒤 공터 같은 땅에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는데 그렇게 번 돈은 모조리 투명한 헌금함에 담겨 돌아왔기에 사실상 착취와 다름없었다. 공식적으로는 오전 7시 아침 예배, 오후 4시 단체 예배가 진행됐다. 단체 예배 시간이면 나와 이민호는 새하얀 예복에 붉은 어깨띠를 두르고 금빛 왕관을 뒤집어쓴 꼴사나운 치장을 해야 했다. 예배당 중앙, 아주 크고 성스러운 크리스탈 조명 아래 선 우리를 둘러싸고 모두 열심히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메시아의 자녀들, 그것이 이곳에서 이민호와 나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사실은 우리한테 비나 저 뒷마당의 소나 개한테 비나 별 차이 없을 텐데도.
"보르시 좀 끓여줘?"
"오빠, 진짜 짱."
험난한 외출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민호는 고기와 야채를 뚝딱 손질해 보르시를 끓였다. 토마토와 비트가 들어가 붉은색으로 뭉글게 끓여진 스프가 한가득 담긴 냄비를 식탁 위에 턱 올린다. 그릇도 세 개, 수저도 세 개. 사람은 둘인데 왜 라는 의문을 표출하기엔 어느새 그 추가된 한 입의 주인이 식탁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오냐."
"황현진 니 먹으라고 끓인 거 아니거든."
"이지, 왜 그래."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 알아 몰라."
"일했는데......"
"엄마랑 떡치는 게 일은 무슨 일."
부모는 이민호가 수치를 모르는 녀석이라고 그랬다. 내가 보기엔 이민호는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황현진과 있을 땐 그래 보였다. 내 시비에 한 숟가락을 뜨다 말고 눈썹이 축 내려간 황현진이 숟가락을 내려놓기 무섭게, 그의 입에 자기가 떠 놓은 것을 집어넣어 주는 걸 보면 말이다.
"사이좋게 지내라니까."
"오빠, 황현진 편이야 내 편이야."
"편 같은 게 어딨니. 세상은 원래 혼자 사는 거란다 얘들아."
황현진은 새로 들어온 일종의 보디가드다. 물론 누굴 지키는데 썩 재능이 있어 보이는 몸뚱아리는 아니었다. 호리한 체형에 부러 만든 건 아닌 듯한 잔근육이나 주먹을 쥐었을 때 튀어나온 뼈가 동양인치고 그럴싸하긴 했지만, 이민호를 제외한 우리 가족의 방문 앞에는 이미 서넛의 러시안 거구들이 가슴을 부풀리며 실탄 든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문 앞을 지키는 시간보다 엄마의 방에서 나오는 모습이 더 자주 목격되었다. 다른 고용인들은 그를 퍼킹 아시안 블론드라 불렀다. 제멋대로 자란 금색의 장발 덕분이었는데 그것은 확실히 그의 얼굴에 베스트로 보이진 않았으나 묘한 분위기로 만들어주는 데는 힘을 주었다.
아무튼 그 퍼킹 아시안 블론드에 대한 아주 비공식적 정보를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그가 쥐새끼처럼 이민호 방 창문을 넘나든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홈스쿨링을 했기 때문에 이민호는 또래와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나마 교회 내에서 비슷한 나이의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놀았지만 이민호에겐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가끔 허락된 동네 외출에도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된 이곳에서 사상 멀쩡한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니 그게 동양인, 심지어 같은 국적의 남자라는 건 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디서 데려온 건데?"
"기차역을 잘못 내렸다는데. 돈 없어서 엄마가 먹고 재워준다니까 따라왔대."
"진짜 바보네. 쟤 약은 안 하나?"
"몰라. 팔은 깨끗하던데."
자비를 베푸는 척 황현진을 주워 온 엄마는 그와 이민호를 만나게 할 생각이 없었을 거다. 어쩌면 나도. 하지만 황현진은 자주 길을 잃는 바보였고 그렇게 길을 잃어 우리에게 왔다.
이민호가 황현진과 붙어먹는 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러시안들이랑 붙어 먹는 것도 봤으니까. (처음 마주한 당시엔 지구가 무너지는 줄 알았다. 이민호가 끔찍한 일을 당한 줄 알고 그대로 총을 가져와 대가리를 따 버리려던 그때, 그는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터놓았다) 그렇지만 이민호 침대 위에 엉켜 있던 두 사람을 정면으로 목격하는 건 썩 괜찮은 경험도 아니었다. 물론 러시안 사태보단 나았지만.
"이미 다 봤거든."
"어... 봤어?"
맨몸의 황현진이 똑같이 맨몸인 이민호 몸 위로 재빨리 이불을 덮어버리는 것에 코웃음이 나왔다. 이민호는 절대 방문을 잠가놓지 않았다. 동생한테 아무것도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는 싸가지 없는 부탁에도 그는 그러러마 했다. 그러나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본인이 그 방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어도 상관없다는 말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아직 팬티는 입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했을까.
"재미 좋네."
"이지,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이불 속에서 웅웅 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옆방에 천사 같은 동생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지금 이게 무슨. 침대 위에 뜯다 만 콘돔을 슬그머니 치워내는 황현진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고함 지를 타이밍도 놓쳤다.
"내가 지금 이민호랑 둘이 할 말 있다고 나가라 하면 나갈거야?"
"......"
"대답해라."
".....혹시 귀만 막으면 안 될까?"
"지랄,"
"지호야."
이불 위로 이민호가 얼굴만 뿅 내밀었다. 곤란한 얼굴이길 기원했으나 눈이 휘어져라 웃고 있기나 했다. 짜증 난다 저 웃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건 억울하게도 진짜다. 이민호가 가르쳐준 고국 속담의 참뜻을 새삼스레 다시 배웠다. 그리고 사실 그보다는 웃는 얼굴에 남아 있는 상처에 마음이 찔렸다.
아비에게는 악취미가 있었다. 거둬들인 헌금이 성에 차지 못하면 실핏줄 터질 때까지 이민호의 뺨을 때렸다.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밥을 주지 않거나 폭언을 퍼붓는 일 정도는 그보다 비일비재했고, 그런 행위들을 모두 큰 부름을 받기 위한 정신 단련이라고 칭했다. 그런 일들을 당하면서 이민호가 하는 말은 딱 하나였다. 지호는 아무 잘못 없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어쨌거나 그들이 낳은 진짜 자식인 내가 당하는 건 본인의 반의반도 아닐 텐데 그랬다. 오빠는 머리가 나빠. 차라리 내가 했다고 그래야지. 엉엉 우는 내게,
나는... 너를 지키는 일이 나쁘지 않아. 그러면 나도 꽤나 쓸모가 있는 인간인 거 같으니까.
반쯤 기절한 상태로 웃으며 그런 말이나 하던 인간이었다.
"내일 이민호랑 놀이공원 갈 거야. 그니까 적당히 하라고."
"어어, 완전 적당히 할게."
"우리 놀이공원 가?"
"응. 내가 어제 가고 싶다고 했잖아."
뻥이었다. 이민호는 내 거짓말에 토를 다는 대신 다른 말을 덧붙였다.
"엄마 내일 일찍 나가신다는데."
그래서 현진이도 프리래. 뭐 같이 데려가잔 말인가? 싫다.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려 봐도 이민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손가락을 딱 한 개 펼쳤다. 딱 한 번만.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황현진은 침대 위에 냅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꼭 모았다. 어쩌라고 푹신하겠네.
"......쟤 티켓값은 오빠가 내든가."
"착하다 내 동생."
다만 나를 바라보는 네 개의 눈동자에 떠오를 원망을 감당하고 싶진 않았을 뿐이다. 난 정말 사람이 너무 착해서 탈이다.
*
"아니, 이 정도면 반값만 받아야 되는 거 아니냐구. 뭐 죄다 운행 중단이래."
"그러게. 눈이 많이 오면 놀이기구는 못 타는구나."
"몰랐어요?"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온 놀이공원인데 엊그제 내린 폭설로 대부분의 놀이기구들이 멈춰 있었다. 그렇게 화려한 놀이공원이 아니라 작은 유원지에 가까운 곳이어서 그런지, 안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형에 탈 수 있다고 해도 좀 무서울 것 같긴 했지만. 이런 데를 와 본 적 있어야 알지. 그 말은 꾹 삼켰다.
사실 우리에게 이런 식의 외부 활동이 가능해진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예전 같았다면 집과 교회를 제외한 어느 곳으로도 허락과 감시하에 이동해야 했다. 일정의 자유를 얻게 된 건 최근 들어 뒤숭숭해진 교회 내부의 분위기 덕분이었다. 교주인 아빠가 주장했던 종말의 날이라는 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신도들의 환희에 찬 불안이 고조되고 있는 모양새였다.
당장은 자기 삶을 제대로 살지 않아도 될 타당한 이유가 생기니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죽으려니 무섭고, 동시에 믿어온 것들이 거짓일까 두렵고. 나는 그들이 참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저들의 멍청함 때문에 우리의 유년 시절은 터무니없는 시간들로 가득 차 버렸으니까. 왜 이런 허접한 교리 따위를 믿는 거냐고. 당신들은 대체 뭘 믿고 싶어서 가족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버리고 여기로 굴러 들어와 있냐고. 경건한 아멘 대신 귓가에 소리치고 싶은 걸 매번 참아내야 했다. 이민호는 나와 생각이 좀 다른 듯했지만 말이다.
그냥, 다들 외로워서 그러지 뭐.
불쌍한 사람들이야. 언젠가 단체 기도가 끝나고 거추장스러운 장신구와 예복을 벗어 던지며 지긋지긋하다고 비명을 지르는 내게 이민호가 그랬다. 이민호는 제 발치에 엎드려 우는 사람들을 매일 수십 명씩 만났다. 끝없는 참회와 회개. 뭐가 그렇게 지은 죄들이 많은지 살아온 삶을 돌이켜 반성하는 이들의 줄이 끝이 없었다. 어떨 때는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인파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가며 기도를 들어주면서 잘도 그런 소리를 했다.
사람이 쓸데없이 이타적이다. 이민호가 자라온 환경이 아무리 봐도 그럴 수가 없는 곳인데도 그랬다. 오빠는 선하게 태어났나봐, 역시 나보단 좋은 탯줄인 거지. 나는 지긋지긋한 메시아의 웅앵 생활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일 것 같은데. 다 끝나면, 이민호와 같이 어디 멀리 다른 나라로 떠나 버릴 거라고 오래전부터 다짐했다. 그 계획에 황현진이라는 변수가 찾아온 건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황현진은 놀이공원에 영 어색하게 구는 우리를 끌고 그나마 운영하는 기구들과 다른 구경거리를 보여주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어디서 고양이 풍선을 사와 이민호 손목에 걸어주더니, 공원 반 바퀴를 삥 돌아 츄러스를 찾아 대령했다. 어린이를 동반한 성인만 입장 가능하다는 다이노 파크의 뒷길로 우리를 인도하고는 어설픈 공룡 모형의 울음소리에도 혼이 빠지게 놀라 우리를 웃겨주었다. 이민호는 그 사소한 모든 일들이 제법 즐거운 듯 보였다. 아니 실은 제법 정도가 아니라 이전에 본 적 없는 즐거움이 눈에 그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괜히 황현진한테 시비나 걸었다.
"여친들이랑 이런 데 많이 와 봤나봐."
"아, 나 원래 놀이공원 좋아하거든. 한국에도 몇 개 있구, 여행 다니면서도 많이 가서."
"놀이공원 좋아해?"
"응, 낭만적이잖아요. 다들 행복해지려고 오는 곳이니까."
낭만이라는 개념을 실제로 구체화해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 얘기를 하는 황현진이 정말로 그 낭만이란 것에 가득 차 보여서 우리랑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어디 하나 나사 빠진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얼어 죽을 낭만이 다 뭐야. 잊고 있던 경계 태세가 발동되기 직전이었다.
"그럼 집은 왜 떠났는데?"
이민호가 잠깐 핫도그를 사 오겠다며 둘이 얘기 좀 하고 있으라고 자리를 떠난 틈이었다. 우리 정도 아니면 집 나가면 개고생이거든. 황현진은 외형적으론 좀 정신 나가 보이기는 했지만 몇 번 대화를 나눠본 바로는 그냥 평범한 그 나이 또래 남자애 같았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곳으로 굴러 들어와서 안 그래도 삶이 피곤한 우리랑 엮인 건지. 저 멀리 공룡의 울음이 울려 퍼지는 벤치에 나와 거리감 가득하게 앉아 있던 황현진이 의외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 운명을 찾으러."
"뭔 개소리야."
"개소리 아닌데....."
"좀, 알아먹게 설명을 해봐."
"운명인 줄 알았던 사랑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진짜 운명을 찾으려고. 그 뒤로 황현진이 들려준 이야기는 줄줄이 기가 막혔다. 여행하다가 무슨 조직 보스의 여자와 만났다고 했다. 그 여자를 위해서 모든 걸 버리고 같이 도망치기로 했는데 여자가 결국 다시 그 남자에게로 돌아갔다고. 돌아가면서 현진이 줄 수 없는 것들이 그에게 있다고 했다.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했으면서. 웃기지도 않았다 정말. 이걸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머리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눈물을 참는 모양새길래 대충 보기 좋은 말로 포장해주었다.
"너도 참 별나다."
"응 고마워."
"그래서, 이제 니 운명이 이민호라고?"
"......뭘 그런 걸 물어보냐."
얼라리요. 여태 부끄러운 수많은 말들을 다 해 놓고 그런다. 운명을 말하는 황현진의 눈이 지나치게 반짝거려서 속이 조금 좋지 않아졌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건 처음이야."
"그런 건 안 물어봤는데."
"사실 맘씨 좋은 주인이 사는 가정집 현금만 쫌 털어서 나갈 생각이었는데. 하하."
"와, 이민호한테 다 일러야지."
"에이, 형한텐 이미 다 말했지."
나는 형한테 비밀 같은 거 없어.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또 이민호를 생각하느라 잔뜩 들떠 보이는 게 영 기분 좋지 않았다.
"야, 그럼 그 대단한 운명의 기준이 뭔데. 첫눈에 사랑에 빠지면 끝이야?"
"음...... 그냥 모든 걸 다 주고, 여기서 지금 난 죽을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니, 죽기까지 해야 돼?"
"그냥... 사랑하면 그러고 싶어지던데."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감정인 것 같아 내게 그런 존재를 떠올려 보려 했다. 누군가를 대신해서 죽는다면... 그 반대라면 모르겠는데.
"웃긴다 너. 그 조직 보스의 여잔가 뭔가 하는 사람도 사랑했다매."
"아냐, 솔직히 그땐 죽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도망쳤거든. 근데 이민호는..."
"이민호는 뭐."
"모르겠어, 그냥 뭔가 형을 보면 자꾸 여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내 걸 다 주고 싶어 그냥."
황현진은 제 심장 근처로 두 손을 모았다. 역시 얘는 좀 이상한 게 맞다. 너한테 사랑은 대체 뭐야. 아니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는 사랑에 관해서만큼은 남들보다 머리와 심장이 하나씩 더 있는 놈 같았다. 야, 이민호 꿈은 자연사야. 앗 그럼 나도 자연사해야징...
"이지, 그럼 나도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뭔데, 참고로 나는 사랑이니 뭐니 그런 거 딱 질색."
"아니... 형 맨날 잘 때 엄청 잠꼬대하잖아. 어릴 때도 그랬어?"
"어?"
"맨날 막 혼자 대화하고, 일어나서 돌아다닐 때도 있고, 그래서 안아서 재워줘야 푹 자던데... 예전부터 그랬나 해서."
".....몰라."
항상 내가 잠든 후에야 이민호가 잠들었기 때문에 그의 잠버릇 같은 건 하나도 몰랐다. 그러나 황현진은, 같이 산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주제에 그런 걸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분하긴 했지만, 누군가를 지키기만 하는 이민호를 지켜주는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게 싫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어이, 좀 가깝다 너네들?"
핫도그를 사 온 이민호는 조금 좁혀진 우리의 거리에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런 거 아니거든? 이민호, 얘 진짜 어마어마한 바보야. 응, 알아. 아, 형! 이참에 관람차도 둘이 타고 와. 죽어도 싫어! 빙글빙글 돌아가는 무지개빛 관람차의 저 꼭대기까지 이민호의 웃음소리가 닿을 듯했다.
*
입으로 흥한 자 입으로 망한다. 이게 아닌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이것도 아닌데.
"씨발, 이민호가 왜 죽어요!"
"지호 자매님, 불경한 말은 삼가하십시오."
"장난해요? 불경한 건 당신들이겠지. 사람 목숨이 그렇게 우스워?"
이민호가 2월 14일 죽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했다. 어머니가 기도 중 메시아의 울림을 들었단다. 종말의 날, 믿음 아래 태어난 빛이 하늘로 보내지면 어둠을 막을 수 있으리라. 메시아는 개뿔. 장로란 작자들이 엄숙한 척 조명을 죄다 끄고 촛불 하나 켠 채로 십자가 앞에 불러 모으길래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나 싶었는데. 그야말로 상상 초월이었다. 꿇고 있던 무릎조차 아까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와중에 이민호는 그들의 헛소리를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 하나면 된다니까 뭐. 다행이네."
"뭐?"
모든 불안과 의문을 잠재울 만큼 아주 화려하고 성대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다가오는 비구름도 볼 수 있는 지평선이 가로지르는 대평원. 아무것도 그 앞을 가로막는 게 없는 평원에 높은 제단을 만들고 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한다. 섣불리 종말을 이야기한 죄의 대가. 어째서 우리의 메시아가 말했던 종말은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메시아의 말씀과 새로운 빛에 대한 이야기를 들먹거리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믿음을 믿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이들에겐 그것이 전부였다. 종말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에 버금가는 더 강력한 믿음의 증명이 필요했다. 곧 누군가의 멋진 개죽음쯤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랄하지 마."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거야."
"오빠!"
그 사람들이 그랬다. 전부 우리 가족을 위한 길이라고. 의식을 거행하지 않으면 분노한 신도들의 손에 다 같이 죽게 될지 모른다고. 본인들은 피 한 방울 희생할 생각이 없으면서 이민호한테는 잘도 숭고한 희생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민호는 그런 방식의 희생에 익숙해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왜, 처음부터 죽어야 했을 사람처럼 굴어.
"나는 이딴 세상에서 절대 혼자 못 살아. 그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 부지할 생각이나 해."
예상보다 순종적인 이민호의 반응에 안심했는지 그들은 우리를 순순히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집으로 가는 길, 모든 걸음마다 이곳에서 탈출할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이민호는 더는 추위 따윈 느껴지지 않아 내팽개친 내 목도리나 바닥에서 주워 목에 칭칭 감아주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데 코끝이 시렸다.
"자연사한다며."
"그건 좀 아쉽게 됐네."
그치만 원래 꿈이란 게 그렇지 뭐. 다 이룰 수 있으면 꿈이 아니지. 이민호는 덤덤하게 했다. 속이 터져 나가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황현진은 또 어떡할 건데. 걔 두고 갈 거야?"
내가 황현진을 패로 가지고 죽겠다는 이민호를 설득하게 될 줄 몰랐다. 그 자식은 지금쯤 이민호가 만들어 준다고 했던 피자나 기다리고 있을 텐데.
"뭐든 다 가질 수는 없어."
"......"
"나는 안 도망치려고."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버려. 덤덤하게 말하던 이민호 목소리가 기어코 떨리는 걸 알아채고 나서야, 나는 이민호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이민호는 강하지만 단단하지 않다. 보기와 달리 무르고 여린 성정에 어려운 선택을 할 바에 자기 자신을 희생해 버리고 만다. 이제 정말 황현진이 필요한 때였다.
"오케이."
"뭐?"
"내가 이민호 대신 갈게."
그래서 은밀하게 지하 경전 서재로 황현진을 불러냈더니 기가 막힌 소리를 했다. 의자 대신 돌로 만들어진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몸에 단단히 기합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농담일까? 농담이라면 좋겠다 제발. 그러나 그제야 언젠가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사랑하면 누군가를 위해 죽고 싶다던 게 황현진이었지.
"미친놈아, 내가 그때 얘기했어, 안 했어. 이민호 꿈은 자연사라니까."
그러자 꼴에 상처받은 얼굴을 한다.
"그니까 자연사하게 니가 좀 잘 도와주라고."
"이지......"
"이민호는 책임감이 아주 강하거든? 너랑 다르게."
"저기요."
"걔는 사실 너도 살리고, 나도 살리고, 지도 살고 싶을 거라고. 다 같이 잘 사는 게 모토인 애라고. 근데 도망가면 자기처럼 누군가 버려진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짜 바보네 그 형."
"그니까 죽느니 마느니 소리 하지 말고 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응."
킁, 그새 눈물이 고인 황현진이 뒤를 돌았다. 대충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줬다. 잘 할 수 있을 거란 말은 굳이 안 했다. 여기서부턴 황현진의 몫일 테니까.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건 진실이 아니거든.
그럼 뭐야.
믿음이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에 대한 믿음. 그것뿐이야.
오빠는 그럼 뭘 믿는데?
나는 믿음이라면 지긋지긋한 쪽이지.
바보는?
나는...
그때 황현진은 한참이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애가 바라보고 있는 건 이민호의 눈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사랑임을 알았다.
*
마지막으로 예배당에 왔다. 내일이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곳이었지만 거사를 앞두고 여길 찾게 된 건 어쩔 수 없이 체화된 습관인가 보다. 그리고 그곳엔 먼저 온 손님들이 있었다. 이민호와 황현진. 인사를 할까 하다 들려오는 대화에 나도 모르게 문 뒤로 숨었다.
"형, 무서우면 그냥 나를 믿어."
"안 무섭거든. 그리고 믿긴 뭘 믿어. 말했잖아 그런 건 다 지긋지긋하다니까."
"왜 또 못되게 말하냐......"
"죽기 전날이니까 좀 봐주라."
"형, 진짜 밉다."
황현진의 말처럼 두 사람은 정말 운명일까? 오빠가 황현진과 단둘이 떠나겠다고 하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지호 잘 돌봐줘. 착한 애야."
"착한 건 모르겠는데 형보단 훨씬 강한 건 알겠어."
"그럼, 누구 동생인데."
"나는 동생 안 시켜줘?"
"어. 동생이랑은 이런 거 못하는데."
장난스럽게 말한 이민호가 황현진의 목덜미를 끌어당기더니 입술을 부딪친다. 못되게 굴 것처럼 굴어 놓고 이민호가 황현진에게 하는 모든 동작은 아주 느리고 부드러웠다. 서로를 매만지는 손길이 애달프기도 했다. 형, 진짜로 죽지마.
"아무거나 그냥 믿어봐. 형 착하게 살았잖아, 기도해 빨리."
"그래."
그 말 만큼은 순순히 따른 이민호의 입술이 열렸다. 이윽고 두 손을 모은 채, 나지막한 음성을 내뱉는다. 높은 천장에 부딪혀 공명이 울려 퍼졌다.
Господи,
дай мне спокойствие принять то, чего я не могу изменить,
дай мне мужество изменить то, что я изменить могу,
и дай мне мудрость отличить одно от другого.
"형, 일부러 나 못 알아듣게 할려고 러시아어로 했지."
"아차, 실수."
"아아, 무슨 뜻인데. 살려달라고 했어?"
"오냐."
"잘했어, 뽀뽀해."
다시 웃으며 입술을 부딪치는 연인들을 본다. 이민호는 제 기도의 음성이 아무에게도 닿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그 기도를.
신이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제게 주소서.
나는 신이 아니다. 그러니 그런 기도를 들어 줄 생각 따위 없었다. 차라리 황현진을 믿겠다. 황현진은 그토록 유치하고 이기적인 사랑의 힘으로 이민호를 구원해 보일 것이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게 우리 모두임을 알았으니까.
*
의식의 날 전에 도망쳤다간 결국 신도들에게 영영 쫓기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믿고 싶은 걸 믿는 자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사기극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걸 한 번에 끝내야만 했다. 그러나 죽음이 아닌 방식으로. 일단 그들이 알아선 안 되는 은폐된 진실의 증거를 모았다. 도시의 경찰들은 모두 부패한 지 오래기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게 뻔했다. 그리하여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은 공교롭게도 또 믿음을 믿는 곳이었다. 드미트리, 우리 도시에 있는 가장 큰 성당. 언젠가 몰래 들어가 봤던 그곳엔 화려한 장식이나 성화는 없지만 어떤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고요라면 이 어린 양들의 불행도 들어주지 않을까. 적어도 메시아 같은 것은 믿지 않는 그들에게 내가 메시아의 딸로 살아왔다 설명하는 것은 아주 신선한 일이었다.
"Я все понимаю, мы вам поможем.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주절주절 사정을 설명하는 것보다 간절한 한 마디가 효과 있었다. 이곳을 떠나게 도와주세요, 형제님. 더는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시내에는 골든 게이트가 있다. 방어 목적으로 만들어진 요새라는데 과거 전쟁 속에 다른 게이트들은 모두 파괴되었지만 골든 게이트만은 파괴되지 않았다고 했다. 골든 게이트를 지나가면 다른 도시와의 분기점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그리고 그 표지판 너머 긴 나무숲을 따라 이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도로가 나왔다. 우리는 그곳으로 가야 했다.
도주를 위해 차를 한 대 부탁했다. 성능은 이 도시를 벗어날 정도면 된다. 그렇게 요청된 빨갛고 각진 헌 차가 하나 우리 앞에 멈췄다. 라다. 개나 소나 이 나라 사람들이 다 끄는 차라 의심받을 일은 확실히 줄 것 같은데 어째 모양새가.
"얘 잘 굴러가겠지?"
"알 게 뭐야, 타."
쾅, 다행히 문은 찌그러진 채로도 잘 닫혔다. 핸들을 잡기 전 그새 땀이 밴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이제부터는 둘 중 무엇이 이기느냐다. 얼어 죽을 믿음과 얼어 죽을 사랑. 우리는 사이드미러가 떨어져 나간 것도 모른 채 신나게 액셀을 밟았다.
의식은 이미 거행되고 있었다. 모든 신도들이 대평원에 무릎을 꿇은 채 한 곳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 평원의 끝에서 손목이 묶인 채 제단 위에 곱게 누워 있는 이민호가 보였다. 마지막 배려로 약물로 먼저 숨을 죽일 거라 했으니 주삿바늘 저 몸에 꽂히기 전에 도착해야만 했다.
황현진이 사 온 더럽게 단 핫초코를 한 모금 들이켰다. 보드카라도 마셔야 하는 거 아니냐 했더니 음주운전은 안 된다며 이딴 거나 사 왔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황현진은 목덜미를 덮을까 말까 하는 금발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고 총을 장전했다. 나는 덩달아 경건해진 마음으로 핸들을 꺾자마자 그대로 속력을 높였다. 우리의 라다는 평원 위를 미끄러지듯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신도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고 장로들이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끼익, 제단 바로 앞에 도착해 바퀴의 마찰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황현진, 쏴!
황현진은 놀이공원에서 퍼레이드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모두의 머리 위로 불꽃과 색색의 종이가 터져 내리는 순간을 사랑한다고. 그래서 특별히 그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개조한 볼리 건을 쥐고 있던 황현진의 손을 들고 방아쇠를 당긴다. 탕탕탕! 세 번의 총성을 신호로 받아 창문 밖으로 힘껏 폭탄을 내던졌다. 펑, 굉음과 함께 공기 중에 연기가 가득 퍼져 나갔다. 혼비백산한 신도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저기요, 이거 다 짜가라 아무도 죽을 일 없거든요? 한 발은 진짜였어도 괜찮았을 텐데.
모두 총알 대신 불꽃이었다.
흡사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아비규환 속에 우리는 이민호를 찾았다. 묶인 손목을 풀 시간 따위는 없어 황현진이 이민호를 냅다 들쳐업고 뒷좌석에 실었다. 내던졌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것 같긴 한데. 다 끝났니... 근데 너네가 왜 보이지.... 마취 약을 먼저 쓴 건지 상태는 영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민호가 여기 있다.
"포기한 거 아냐."
"응?"
"나도, 황현진도, ....오빠 엄마도."
다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빠를 지킨 거라고. 그러니까, 오빠는 한 번도 버려진 적 없다고. 이민호가 우리를 지키겠다는 이유로 죽음을 결심했다고 해서 나와 황현진을 버린 게 아닌 것처럼. 모두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온 것뿐이다. 나에게는 하나뿐인 가족, 그리고 황현진에게는 하나뿐인....
"형, 흐어, 죽지마, 사랑한다고오......."
"야, 야. 그냥 약기운 땜에 그래. 정신 차리고 여기 네비 같은 거 안 보여?"
"흑흑, 80년대 똥차에 무슨 네비게이션이 있겠냐구."
"아씨, 그럼 일단 게이트 밖으로 간다 그럼?"
"이지호, 황현진 안전벨트 매라...."
그 와중에 안전벨트를 찾고 있는 이민호와 그런 이민호를 끌고 안고 울고 있는 황현진. 난리도 아닌 걸 내버려 두고 온 정신을 운전에 집중했다. 평원을 빠져나오자 도로변을 사이에 두고 신실한 건물들이 언제나처럼 나란히 서 있다. 우리는 이제 그곳을 가로질러 간다.
사랑은 한 가지의 종류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유일한 대상으로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발현될 수 있다. 나의 가족, 그리고 그의 연인. 그건 조금 낯선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아주 오래 외로웠던 이민호를 축복해 줄 멋진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분명히 행복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건 믿음을 이긴 최초의 사랑이니까.
epilogue.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Corinthians 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