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a sudden call
하루종일 진눈깨비가 내렸다.
이민호가 대구에서 마지막 재판을 마치고 부산 거제동의 사무실로 돌아온 시간은 이미 저녁 7시를 넘기고 있었다. 공식적인 업무시간이 끝나 조명을 줄여 둔 로펌 복도를 지나 방문을 열자 낮 동안 비서가 가져다 둔 기록봉투들이 쌓여 있었다.
기묘할 정도로 일진이 나쁜 하루였다. 작게는 예기치 못한 교통체증에서부터, 크게는 재판 직후 법원 마당에서 상대방 당사자에게 멱살을 잡힌 일까지. 그 실랑이를 하는 동안 눈에 젖어버린 코트를 스타일러에 넣으며 한숨을 흘렸다. 의뢰인에게 보낼 기일진행 보고서를 어떻게 쓸지 생각을 이어가다 갑자기 울린 내선전화에 의자에서 등을 뗐다.
유난히 전화벨 소리가 불길하게 들리는 날이 있다.
심장을 조이는 나쁜 촉을 무시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야간 당직비서였다.
“이 변호사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강서경찰서 유치장에서 접견 요청이 있어서요.”
“오늘 구속사건 당번이 저였나요?”
“아, 아닙니다. 변호사님을 지정하셔서요. 담당하고 계신 성원운수 관련 건이기도 합니다.”
“죄책은요.”
“특수상해…인데 피해자가 의식이 없다네요. 피의자는 성원운수 직원이고, 거기 지점장이 피해자입니다.”
누가 깡패새끼들 아니랄까 봐, 아무리 번드르르한 운수업의 탈을 써봤자 하는 일은 거기서 거기라 이거지. 속으로 혀를 차고 서류가방을 꺼내면서 수화기를 반대편 어깨에 바꿔 꼈다.
“성원은… 우리 파트가 자문 담당이긴 한데, 이건 형사사건이라. 형사파트랑 교통정리 문제 없을까요?”
“피의자 요청이 명확해서요. 미리 양해 구했습니다.”
“알겠어요. 오늘 구속적부심 청구하면 내일 아침에 법원 들어가겠네요. 서류 제출 좀 부탁드리고… 전 10분 뒤에 출발합니다.”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그리고…잠시만요. 남긴 메모가 있습니다.”
“네.”
“혹시 맡지 않겠다 하시면 전해달라고, 이름을 남겼다네요.”
“네?”
“황현진… 이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분주히 가방을 챙기던 손이 멈췄다.
-
경황없이 택시를 타고 나니, 마침 얼마 전 창빈이 강서경찰서 수사과로 옮겨간 것이 생각났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문자에 곧 답신이 왔다. ‘와서 얘기하자.’ 굵어진 눈발에 택시 앞유리가 하얘졌다 검어지기를 반복했다. 창빈은 경찰서 앞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실내에서 나누기 껄끄러운 대화가 있다는 뜻이다.
“왔나. 여기여기.”
둘은 같은 로스쿨 동기였다. 창빈은 민호와는 달리 수도권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변호사 합격 후 경감특채로 경찰이 되어 부산에 내려온지 고작 몇년만에 제법 유창한 사투리를 구사하게 됐다. 수사중에 말투가 튀면 쓸데없이 경계를 받는다는 게 이유였다.
“아는 사이? 어려보이드만?”
“뭐… 예전에 알던 사이긴 했지.”
“근데 왜 하필 성원에 들어가있노?”
“그러게. 나도 몇년간 소식을 못 들어서. 들어가서 물어봐야겠네.”
“그래라. 가 아까부터 입 딱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해서 조사 진행이 안 된다.”
“뭐?”
“지점장 몸에 칼자국만 여섯군데다. 사무실이 피칠갑 됐겠제? 근데 칼에 찍힌 지문은 지 것도 아니고, 가 옷에 피 한방울 안 묻었는데… 지가 설명만 잘 했다면 그냥 참고인 아니겠나?”
“그런데 왜. 대답을 어떻게 했길래?”
“동네방네 사이렌 울리고 갔는데 도망도 안 가고 창고 앞에 떡 서있더란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 뭐 본거 없는지, 물어봐도대답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수갑 채운거지.”
“…”
“내는 가 말 못하는 줄 알았다. 근데 갑자기 형 이름 댄다 아이가. 법무법인 세계, 이민호 변호사님 불러주세요.”
B. Back in Black
황현진.
올해 스물셋.
성원운수 강서지점 근무. 같은 곳 옥탑방에서 주로 숙식하지만 주거는 일정치 않음. 최종 학력 고등학교 검정고시. 부모는 생사불명, 다른 가족은 없음. 전과는 미성년자때 저지른 자잘한 것 두어개.
현진은 경찰서 접견실의 철제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천장을 보며 수사관이 조서에 적은 얄팍한 정보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진실과 거짓,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바깥에서 벨이 울렸고 경찰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는 걸 보니 그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그의 이름을 처음 말한 시간으로부터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정말 곧바로 뛰어온 모양이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가 되었다. 경멸, 분노, 혹은 죄책감. 뭐든 좋을 것 같다. 우리 지난날을 조서처럼 꾸미면 어떤 게 나올까. 만약 절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누구의 잘못이라고 결론지을까.
이민호.
지난 몇년간 현진이 잊은 적 없는 이름이었다.
-
현진은 어린 시절 그를 처음 만났던 여름날 어느 대학교 로스쿨의 리걸클리닉 상담실을 떠올렸다. 흰 반팔 티셔츠와 파란색 체크남방, 동그란 안경을 쓴 이민호는 태어날 때부터 저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 같았다. 길에서 떠돌던 현진이 우연히 전봇대에서 뜯은 전단지 한 장이 아니었다면 영영 만날 일도 없는 사이였으니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OO대학교 리걸클리닉]
[매주 수요일 공익사건 무료 법률상담]
로스쿨 학생들은 상담 실습을 하고, 사회적 취약 계층이나 억울한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무료 법률상담의 기회를 주겠다는 게 리걸 클리닉의 취지였으나, 현진은 제게 필요한 것이 엄밀히 말하면 법률상담은 아니라는 것조차 몰랐다. 몰라서, 그저 전단지 한장 쥐고 무작정 찾아갔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된 대학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지저분한 탈색모와 너덜대는 싸구려 정장이 얼마나 이질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르고.
‘저기, 저 좀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초여름 더위에 지쳐 비척대며 사무실 문을 연 현진에게 시원한 물컵이 내밀어졌다. 없는 말주변을 쥐어짜내 제 사정을 설명하는 내내 진땀을 흘리느라 에어컨도 무용지물이었다.
고작 몇분만에 설명할 수 있는 지난 십구년의 인생이 부끄러워 시선은 탁자 위로 점점 더 처박혔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처맞는게 좆같아 시설에서 도망쳤다. 보호종료를 고작 1년 앞두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지. 잘 곳이 없어 가출팸을 따라다니다 보니인천 폭력조직의 따까리 비슷한 게 되어 있었으며, 어느날 심부름으로 건넨 가방에서 흰 가루가 든 지퍼백을 본 것 같다는 이야기 따위.
어디까지는 해도 되고 어디까지는 하면 안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서 내내 횡설수설했다. 현진의 이야기는, 어느날 밤 컨테이너 쪽방에 누웠을 때, 문득 이렇게 점점 깊은 곳까지 가다가는 어떻게 될 지 무서워져 가방 하나 들고 도망나왔다는 대책 없는 결말로 끝이 났다. 제가 생각해도 한심했다. 고아로 태어났대도 모두가 조폭 끄나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아니까.
하, 여튼 씨발.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나라도 할 말 없겠다.
현진은 머쓱한 심정으로 제 주머니 속에 고무줄로 묶인 지폐가 몇장 남았는지 헤아리기 시작했다. 당장 오늘 밤은 어디서 잘지 막막했다. 맞은 편에 앉은 남자는 앞에 있는 상담일지에 한 글자도 적지 않고 내내 현진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다가 쩝, 옆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그래. 뭐, 일단 밥부터 먹자.’
나중에 생각해 보면, 현진에겐 드물게도 운이 좋은 날이었다.
그날은 마침 정기 상담이 있는 수요일이었고, 원래라면 2학년이 담당하게 되어 있는 상담 업무를 3학년인 이민호가 대타를 부탁받아 와 있었다. 그런 우연이 겹친 결과 현진은 머물 곳을 얻게 됐다. 민호가 선뜻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돕겠다고 나서주었기 때문이다.
‘너 운 되게 좋다.’
‘네?’
‘마침 방학이어서 기숙사가 텅텅 비었거든. 나랑 같은 방 쓰면 되겠다.’
사실은 민호가 담당 교수까지 동원해 부탁하고 몇개월치 기숙사 이용료를 미리 내며 애썼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청소년 후원재단을 연결시켜 줬고 시간을 쪼개 직접 현진의 검정고시 공부까지 가르쳤다.
현진으로서는 그런 대가 없는 호의를 받아본 적 없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사실 제 친부모에게서도 그런 걸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시설에서 지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 모든 것을 염치없이 넙죽넙죽 받으면서도 습관처럼 눈치를 봤다.
‘형은 나한테 왜 잘해줘요?’
한달쯤 뒤에나 겨우 그걸 처음 물어보는데도 꽤 용기가 필요했는데, 막상 이민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잘해준 적 없는데? 사람이 잠은 자고 밥은 먹어야지.’ 그런 식으로 눙쳤다. 마침 네가 찾아온 곳에선 그게 별 어려움 없이 가능하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그런 무심한 다정함에 기대지 않을 방법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변호사시험을 앞둔 로스쿨 3학년의 여름방학이 얼마나 바쁜지 모르는 현진은 늘 깊은 새벽까지 공부하는 민호에게 잠 좀 자라고 떼를 썼다. 가을이 깊어갈 즈음에는 거리감이 옅어져 아무때나 제멋대로 끌어안고 엉켜 매달렸다. 민호는 늘 무겁다고 타박하면서도 그닥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 현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주 그런 말을 했다.
‘너한테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으면 더 노력해야 돼. 네가 너를 지켜줘야지.’
‘알아. 맨날 그 소리.’
‘사람 너무 쉽게 믿지 말고. 하여튼 넌 정이 너무 많아서.’
‘내가? 나 안 그러는데. 형한테만 그러지.’
그의 앞에서 현진이 얼마나 피나는 내숭을 떨었는지 그가 안다면 절대 그런 말은 못할 것이었다. 눈도 착하게 뜨고, 숨도 착하게 쉬려고 노력했다.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럼 다행이고. 여튼, 자기를 망치는 방식으로 화풀이하지만 않으면 돼. 그럼 너한테만 손해야.’
생각보다 꼰대같은 잔소리가 많은 타입이었다. 그런데 그 잔소리 듣는게 전혀 싫지 않았다. 형 말고는 아무도 그런 말 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현진은 티비에서 자주 보는, 부모에게 반항하는 사춘기 청소년들의 모습이 철없는 투정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다 누울 자리가 있어야 발을 뻗는 거지.
형은 몰라. 내가 밖에서 뭔 짓 하며 구르고 다녔는지. 사실 정식 조직원도 아닌 미성년자가 심부름이나 하며 저지를 수 있는 나쁜짓은 기껏해야 사소한 범법행위 수준이었지만, 현진은 제 과거의 악행을 박박 씻어 없애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런데 사실 딱 한가지, 형에게 말 못한 일이 있었다.
민호에게 온지 얼마되지 않아 전화 한통을 받은 적이 있다.
- 진이 잘 지내냐. 어디 아픈 데 없고?
‘…네, 실장님.’
도망쳐왔던 곳에서 제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위에 있는 사람. 교양있는 말투와 푸근한 아저씨같은 첫인상에 속은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 그래. 우리 사이에 빚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먹이고 재워준 거야 자선사업 했다 치면 그만이다. 너도 알지? 일 싫다고 제발로 나간 애들한테 내가 언제 아쉬운 소리 하더냐.
‘네. 죄송해요…말 없이 나와서.’
- 그런 소리 하려던 건 아니고. 너도 알겠지만, 우린 이제 아랫지방으로 아예 옮겨갈 참이다.
하루이틀 한 사업도 아니고, 이 많은 식구들을 데리고 업장을 통째로 옮기려니 일손이 부족하다는 넋두리가 이어졌다. 현진은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더 듣고 있다간 또 예전처럼 말려들어갈 것 같았다.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원하는 걸 손쉽게 얻어가곤 했으니까.
‘저기, 실장님 죄송한데요 전…’
- 왜 또 넌 겁부터 먹냐. 돌아오라는 것도 아니고 일 시킬 것도 아니라니까. 그냥 마지막으로 인수인계만 좀 해 주면 고맙겠구나.
마지막으로.
실장의 말을 머릿속에서 굴려 보아도 늘 그랬듯 뭐가 맞는 일인지는 모호해 보였다. 현진은 늘 뿌연 안개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주어진 선택지를 고르고, 나중에서야 그게 최악의 수였다는 걸 깨닫는 일을 수없이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게 죽도록 지겨웠다. 난 왜 늘 이렇게 멍청한 짓만 할까. 배워먹은 게 없어서 그런가.
그러나 정말 이게 마지막이라면, 그게 그저 현진이 실수로 들고나와버린 열쇠들을 후임자에게 전해주는 일에 불과하다면. 차라리 더 이상 과거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매듭을 지을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며칠 뒤 약속장소에 나간 현진은 제가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알았다. 키를 받을 사람은 저보다도 어려 보였다. 개새끼들, 또 어디서 나처럼 갈 데 없는 어린애를 꼬드겨 와서는. 민호가 제게 하는 걱정들이 그제서야 조금 이해가 됐다. 뻔히 보이는 불길 속으로 섶을 지고 들어가는 꼴을 보는 기분이었겠지.
그러나 나는 형과 달라서, 내가 살겠다고 남의 머리를 밟고 기어나가는구나.
‘여기요.’
어둠이 내린 부두의 바닷바람을 막기에 그애의 작업복 점퍼는 너무 얇아보였다. 파리한 안색 때문인지 그게 마음이 쓰였다. 왜 이래, 형 옆에서 착한척하다가 별게 다 옮았네. 현진은 망설임을 참느라 거의 이를 악물고 열쇠를 건넸다. 그애는 말없이 꾸러미를 받아들고 현진의 설명을 들었다. 이건 바이크, 이건 트럭, 이건 바지선… 기억나는대로 써온 간단한 주의사항도 같이 건넸다. 인수인계라고 할 만한 복잡한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때그때 시키는대로 하는 게 말단의 일이다.
‘네, 확인했습니다. 실장님껜 제가 연락드릴게요.’
‘그… 저기요.’
기만인 걸 알지만. 그를 대신해 다시 더러운 일을 하러 올 자신도 없지만. 사실은 일초라도 빨리 형에게 돌아가려는 마음 뿐이지만. 그래도.
‘생각하시는 일이랑 다를… 수도 있거든요. 저는… 저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도망쳤거든요.’
‘……’
‘저기, 제가 이런 말 하는것도 웃기긴 한데… 혹시 뭐가 좀 아니다 싶으면, 그러면 빨리 그만두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그런가요.’
‘……’
‘안 한다는 선택지가 있으셨나보네요.’
그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탓하는 투는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과 체념한 목소리. 하긴 그렇지, 모두에게 각자의 인생이 있는 거니까. 그렇지만 설마 저보다 더 나쁜 사정이란 게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현진은 그가 자신을 비난하지 않았음에도 몹시 부끄러워졌다. 내가 뭐라고 꼴에.
그래서 모른척 눈감고 뒤돌아, 그날의 일을 전부 잊기로 했다. 따뜻한 그의 기숙사로 돌아와 섬유유연제 향기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렇게 모든게 해결되었다고 믿었다. 머리를 땅에 파묻고 제 앞이 보이지 않으면 잘 숨었다고 믿는 동물들처럼.
난 멍청하니까 앞으로는 형이 늘 알려주면 좋을텐데… 누구를 믿으면 되는지, 어떻게 살면 되는지.
현진은 막연하고 아득한 미래를 그리며 그의 인생에 계속하여 끼어들어갈 구실을, 언젠가는 그에게 보답할 기회를 갖는 걸 목표로 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결국에는 버릴 작정으로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했던걸까. 이제와서는 알 수 없어졌지만.
민호는 1월의 어느날, 변호사시험을 치르자마자 말 한마디 없이 잠적했다.
현진은 몇개월 후 변호사시험 합격 명단에서 그를 발견하고 나서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이 쉽게 유기되었을 뿐임을 알 수 있었다. 제 친부모나, 제가 도움을 요청했던 모든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진에겐 아무런 설명도 양해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때쯤 낯익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 진아. 네 자리에 결원이 생겼는데. 혹시 생각이 바뀌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했다.
‘결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얼마전 거제 고현항에서 큰 물건을 들여오다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행동대장은 중국으로 도피했고 두어명이 실종되었다. 제게서 열쇠를 받아간 소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는 못했다. 도망치지 않았다면 그 일은 현진에게 일어났을 것이다. 죄책감을 갖는것조차 죄스러워 아무 말도 못했다.
또다시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간절히 도망쳤던 곳인데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해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제게 어울리는 자리는 오히려 그곳인것 같았다. 민호는 현진에게 입버릇처럼 자기를 망치는 방식으로 화내지 말라고 했지만, 가진게 몸뚱이 하나인 현진에겐 자기 자신 이외에는 마음대로 집어던져 망칠만한 것이 없었다.
복수같은 거창한 단어는 걸맞지 않다. 그에게 원한을 갚을 만한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저 내키는대로 저를 주웠다 다시 내버린 바람에 결국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
현진이 옛날 일을 생각하며 접견실에 비치된 갱지를 손으로 차곡차곡 접고 있을 때, 급한 구둣발소리가 가까워지고 문이 벌컥 열렸다.
내내 기다렸던 사람이 문앞에 우뚝 섰다.
“……”
“와. 오랜만이네, 형.”
이마 뒤로 넘겨 고정시킨 머리, 검은색 싱글버튼 코트와 감색 수트, 각진 서류가방. 돈 잘버는 변호사의 전형과도 같은 차림이었다. 지금 부산에서 제일 비싼 변호사 중에 한명이라고 했던가. 졸업하면 인권변호사가 되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며, 기왕이면 다 같이 잘 사는게 좋지 않냐던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만 그의 표정만은 현진의 기대를 꽤나 만족시켰다.
당황과 실망, 희미한 경멸. 그 표정을 보는게 오랫동안 바라왔던 소원이었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괜찮았다. 그래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는 표정을 만드는 게 너무나도 쉬웠다.
“근데 생각보다 늦었다. 나 여기서 빼내려면 할 일이 많을텐데.”
C. Closer
다음날 아침, 부산지방법원 서부지원 형사법정.
평소보다 이르게 법원에 도착해 법정 방청석에 앉은 민호는 마지막으로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잠이 부족해 눈이 뻑뻑했다. 당장 한나절만에 벌어진 일들이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일을 맡은 이상 주어진 일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의뢰인이 워낙 비협조적이라 쉽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어젯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현진은 시커먼 양복에 광택 나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비즈니스 캐쥬얼을 입는 시대이다 보니 새파랗게 어린 현진의 정장 차림이 오히려 이질적이고 수상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깡패와 법조계 종사자만 검은색 수트를 입게 된 걸까, 쓸데없는 잡생각이 스쳤다.
어쩌다 자신에게 연락하게 된 건지, 부산엔 언제 내려온 건지 궁금했지만 시간이 부족했으므로 당장 필요한 질문부터 했다. 접견실 구석에 앉은 경찰을 의식해 경어를 썼다.
‘체포되기 전엔 뭘 하고 있었습니까.’
‘몰라? 기억 안 나는데.’
‘근처 cctv는요.’
‘모르겠는데. 아, 창고 문 앞에 달린건 짭이야. 쿠팡에서 산 사천원짜리.
아이, 그거 내가 진작 바꾸자고 했는데, 이런 공사판 구석데기까지 누가 오냐고 짠돌이처럼 굴더니만. 본인 뒤질때 못 써먹을 줄도 모르고.’
그 후로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건넨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삐걱대는 철제의자에 아무렇게나 기대앉은 현진은 마치 일부러 일에 어깃장을 놓으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런 건 보통 두 가지 중 하나다. 조직에 충성하느라 누군가의 대타로 몸빵을 하는 중이거나, 혹은 수면 아래 숨겨진 더 심각한 범죄를 은폐하는 중이거나.
현진의 변호인 선임료는 성원운수 법인계좌에서 인출되었다. 그게 뭘 뜻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어 일단은 석방에 집중하기로 했다. 혐의에서 벗어날 증거가 부족해서 현진 본인이 구속된 상태에서는 적절한 방어전략을 세우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황송하게도 지명까지 받았는데, 체면을 구길 수야 없지. 혼란 속에서도 묘한 오기가 생겼다. 나이에 비해 빽빽하게 쌓은 커리어가 공으로 생긴 건 아니었고 이민호가 내세울 만한 건 불리한 상황으로 굴러떨어질수록 이를 갈며 덤비는 승부욕 하나였다. 갑작스럽게 던져진 이 사건 역시 어디 한번 해보겠냐고 약올리는 것 같았다.
법원에서 진행되는 체포구속적부심은 피의자를 풀어줄 이유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어서, 체포 과정에서 경찰의 잘못이 있거나 구속 이후에 달라진 사정(예를 들면, 유리한 증거가 발견되었다거나)이 있어야만 승산이 있었다. 현진의 경우 새로 발견된 증거가 없어 결과를 낙관하기 어려웠다. 반면 그가 진범이라는 확증도 없었으므로 불확실한 상태로 구속기간이 늘어나는 것 역시법원과 경찰의 부담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승패의 확률이 비등비등한 상황이었다. 필요한 것은, 재판장의 생각을 석방 쪽으로 밀어줄 마지막 빈칸.
던져볼 수 있는 모든 패를 가늠하며 생각에 잠겨있던 민호는 법정 경위의 안내에 벌떡 일어섰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법관 전용 출입문으로 펄럭이는 법복을 입은 젊은 판사가 입장했다.
“앉으시죠. 오늘 서부지원 체포구속적부심사를 진행할 강현우 판사입니다.”
미리 확인한 당직순번에서 강 판사를 발견했을 때 조금의 희망을 봤다. 작년까지 의욕적으로 소년재판을 맡아왔던 사람이라, 현진의 불우한 환경에 우호적으로 반응할 만한 확률이 그나마 높아 보였다. 호명을 받고 첫 순번으로 대기실에서 불려온 현진이 자리에 앉았다. 민호 역시 변호인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키는대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읊는 현진의 태도가 지나치게 여유로워 보였다. 그런 건 진지하지 않다는 인상으로 비춰질수 있다. 민호가 눈짓하며 슬쩍 고개를 저어보였지만 현진은 장난스런 웃음으로 응수했다. 뒷골이 당겼다. 그래, 협조할 생각이 없으시다는 거지.
골무를 낀 판사의 손끝이 서류를 빠르게 팔락거렸다.
“변호인, 청구사유 진술하시죠.”
“예. 먼저, 피의자는 현행범 체포되었으나 범행현장과는 분리된 곳에 있었으므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 명백하지 않습니다.”
“흠… 영장이 없었다는 점에 대한 지적인가요.”
“그렇습니다.”
“뭐, 그 부분은 수긍이 가긴 합니다만… 현장과는 고작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죠. 거기 있었던 이유를 적극적으로 설명하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다른 피의자가 없는 상황에서 피의자를 선뜻 놓아준다는 것 역시 합리적인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떤가요.”
민호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하지만 재판장님, 피의자는 경찰을 상대로 도주를 시도하거나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현행범 체포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도망의 우려가 없다 하겠습니다.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받게 해 주십사 간청드립니다. 소환 요청이 있을 경우 성실히 임할 것입니다.”
“글쎄요… 도주 우려에 대해 보자면, 거주지가 명확한 상태가 아니네요. 피의자는 사건이 일어난 지점의 옥탑에서 살았던 것 같지만 지금은 수사를 위해 폐쇄된 상태죠. 그 이외에는… 동종범죄는 아니지만 전과도 있고, 도주 우려가 전혀 없다고 보기에는부족할 것 같은데.”
아이고. 가벼운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예상했던 지적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했던 패를 꺼내도 되는걸까. 잠시 머뭇거리다 현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괜히 힘빼지 말라는 듯 시니컬한 웃음. 거기에 되려 오기가 생겼다. 그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넌 나와는 다른 결과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순순히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변호인이 직접 신원보증을 하겠습니다.”
“가족이 아니라, 변호인이 직접 말입니까?”
판사가 처음으로 서류에서 눈을 떼고 민호를 바라봤다.
“피의자에게는 신원보증을 해줄 가족이 없습니다. 사실 본 변호인과는 로스쿨 재학시절부터 아는 사이입니다. 리걸클리닉과 연계된 청소년 지원프로그램을 통해 구조했거든요. 그 때의 인연으로 저를 선임한 것입니다.”
“……”
“재판장님, 피의자가 현장에서 적절한 답변을 하지 못했던 것은 물론 잘못입니다. 하지만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했기에, 혹시 불리한 진술을 하게 될까 불안했던 나머지 최대한 설명을 자제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조사에 성실히 임하고 진범이 체포될 수 있도록 협조할 것입니다.”
현진이 ‘제가요?’ 라는 표정을 짓는 것쯤은 가볍게 무시했다.
“피의자가 비록 성인이기는 하나 만 24세 이하의 청소년으로, 개정된 아동복지법 기준으로는 여전히 보호종료 대상에 해당합니다. 법적 보호자가 없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한번 더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
잠시 민호를 빤히 보던 판사가 탁, 서류철을 덮고 사무관을 불러 귓속말을 했다. 사무관이 무언가를 타닥타닥 받아쓰는 동안 고심하며 서류를 펜끝으로 두들기던 판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변호인, 피의자의 주거지를 제한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주거지는 당분간 제 자택으로 해 두고 변경될 경우 즉시 알리겠습니다. 허락하신다면 보증금은 보증보험증권으로 납부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석방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나쁘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현진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웃음기가 걷혀 있었다.
그래, 그딴 작위적인 표정을 집어치우니 보기에 좀 낫다. 네가 무엇을 바라고 날 찾아내 변호인으로 세웠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나를 선임한 이상, 난 널 여기서 빼내고 네 무죄를 입증할 작정이다.
그건 네가 한 일이 아니니까.
D. Dragged
갇혀 있던 시간은 고작해야 이틀이었는데, 경찰서 앞마당으로 걸어나오는 길의 오후 햇살이 좀 어색했다. 나오기 직전에 조사를 담당했던 우락부락한 수사관이 명함을 건넸다. ‘나 민호 친구니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다신 이런데 오지 말고, 임마.’ 친구끼리는 오지랖도 닮나? 그런 삐딱한 생각을 하며 걸어나오는데 낯익은 인영이 서 있었다.
“웬일이세요. 이런데까지 직접.”
“진아, 고생 많았다.”
그 당시엔 실장이었지만, 이제 본부장이 된 남자가 온화하게 웃으며 검은 비닐봉지를 건넸다. 잔챙이에게 베풀기에는 과분한 친절이었다.
“겨우 유치장인데요. 오바 아닙니까.”
“미신이래도 지킬 건 지켜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이 넌데.”
봉지를 받아 내용물을 한입 베어물면 미지근한 두부가 입속에서 미끄덩거렸다. 손등으로 대충 입을 닦고 검은 차에 따라 탔다. 감사합니다, 형님. 제가 들어도 성의없이 웅얼거린 말은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갔다.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고, 그가 서류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 변호사 말이다, 부산 바닥에 소문이 자자하더니 뭔가 좀 다르긴 하더구나.”
“……”
현진이 며칠전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성원운수라는 물류회사로 위장한 그의 조직은 얼마전 법무법인 세계에 자문계약을 제안했다. 담당은 이민호 변호사로 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돈만 되면 뭐든 해결해준다거나 산업재해, 노동 관련 사건이면 거의 진 적이 없다는 소문에 구미가 당겼던 모양이었다.
조직은 몇년 전 고현항에서의 실패 이후 다시금 큰 건을 준비하고 있어, 수반되는 서류작업을 깔끔하게 처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젊고, 일 잘 하고, 담력도 있고, 도덕성이 희박하며, 돈 욕심이 있는 남자 변호사. 이민호는 까다로운 조건에 부합하는 인재였다.
그는 이번 일로 이민호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 갑작스럽고 불리한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혹은, 무언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호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민호의 일처리에 꽤 만족한듯 보였다. 한밤중에 달려와 한나절만에 유일한 피의자인 현진을 빼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범인을 해외로 빼돌릴 시간을 벌기 위해 대신 몸빵 좀 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땐 이참에 민호의 얼굴이나 한번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민호가 제 사건에서 그냥 졌으면 했다. 굳이 얽혀서 좋을 게 있는 인간들도 아니고. 그가 돈을 갈퀴로 쓸어담듯 벌고 있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돈이 아무리 좋아도 일은 좀 가려서 받아야 하지 않나.
“이번 기회에 빚이나 좀 지워 두려고 한 건데, 자력으로 널 빼낼 줄은 몰랐다. 일전에 만나봤을 때 눈빛이 남다르긴 했어.”
“…뭐. 승소율 깎이기 싫었나보죠.”
“그래,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반가웠겠구나.”
“……”
현진은 말없이 그를 돌아봤다. 알고 있었구나. 차 안에 강하게 틀어진 난방 때문에 숨이 막혔다. 제가 요청해서 이민호가 선임된것이 아닌데도 긴장이 됐다. 굳이 이민호를 자기 사건에 붙여준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안 갔다.
“진이, 너 기억하냐. 너 어릴때… 반항인지 뭔지 몇개월 농땡이쳤던 적 있지. 그 바람에 괜히 엄한 일반인이 휘말려서 다 뒤집어쓰고 골로 간 일 있잖냐.”
그는 현진의 입매가 굳는 것을 확인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믿는 가장 튼튼한 목줄은 현진의 나약함이었다.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할 것은 경계해야 마땅하지. 그래야 만용으로 인해 그르치는 일이 없을 터였다.
“그래도 그 일 아니었으면 우리 인연도 이렇게 오래 못 왔지. 부산 내려와서 자리잡느라 니가 고생 많이 한 것도 알고.”
“…네. 알아주시니 감사하죠.”
“우리 계획과는 조금 다르게 됐다마는, 오히려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었으니 잘 된 거 아니겠냐.”
애초에 ‘우리’의 계획이 무엇인지 전혀 들은 바 없던 현진은 그저 고개나 끄덕거렸다. 그놈 그거, 그 나이에 자수성가해서 집이며 차며, 돈 쓰는 씀씀이를 보면 한없이 위로 올라가고 싶어하는 부류라 별 걱정은 없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자꾸 조심성만 많아지는구나. 마침 너와는 과거에 연이 있었던 것 같으니, 다른 수고를 덜어 다행이지.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는 그는 마치 현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그가 감시하려는 사람은 이민호일까, 아니면 나일까?
지점장이 칼에 찔리던 날 창고 앞에 세워둔 차량의 블랙박스는 지금 현진의 옆에 앉은 남자만이 가지고 있었다. 그도 현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그 자료를 수사기관에 제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했다. 남자는 현진에게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E. Escalated
민호는 로펌의 제 방에 앉아 창문을 통해 한참동안 바깥을 쳐다봤다. 어둠이 내린 법원앞 큰길은 적막했다. 창빈으로부터 현진의 석방 사실을 전해들은지 벌써 몇시간이 지났다. 명함을 주었으니 연락처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어 슬슬 초조하던 차였다. 그때 등 뒤에서 툭, 사무실 불이 꺼졌다.
돌아보니 복도까지 전부 깜깜했다. 잠깐의 적막과 일인분의 고요한 숨소리.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동안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갸름한 실루엣과 존재감이 강한 향수. 민호는 긴장했던 어깨를 풀었다.
“황현진.”
사무실에 찾아올 것은 반쯤 예상하고 있었다. 검색창에 펌 이름만 쳐도 주소가 나오니 어려운 일도 아니고.
“뭐야. 나인 줄 어떻게 알았지?”
“이런 장난 칠 사람이 너밖에 더 있냐.”
삼년, 아니 사년만이던가. 함께 있었던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인데 마치 며칠전에 본 사람처럼 익숙한 존재감이었다. 민호에게 그는 언제나 자기보다 어리고 연약한 존재였으므로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발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가까워진 현진은 민호의 책상 위로 풀썩 걸터앉아 얼굴을 마주봤다. 쌓여있던 기록봉투가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누가 그러던데. 형 담력이 좋다고.”
틀린 말은 아니네. 이걸 장난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우리 지점장처럼 콱 찔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현진은 또다시 웃고있었다. 긴 손가락이 민호의 뺨을 나긋하게 스쳤다.
“형이 날 기억이나 할 지 궁금했는데.”
“…당연히 기억하지, 그럼.”
“황송해라. 이럴 줄 알았어. 기억한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좆같을 것 같더니, 진짜네.”
뭐… 그래도 기억이라도 해준 게 낫다.
기억 못했으면 진짜… 형 죽여버리고 싶었을 것 같아. 숨결이 지척까지 가까워졌고, 현진은 마주본 목덜미에 푹 고개를 파묻었다. 콧날과 숨결, 건조한 입술까지 아무렇게나 목 피부를 스쳐 지나갔다. 민호는 피하지 않았다. 마주 안아주지도 않았지만.
“오지랖은 여전하더라. 무슨 생각이야? 형이 풀어준 게 진짜 살인범이면 어쩌려고.”
“피해자가 살아있으니 아직 살인은 아니지.”
“그래봤자야. 그 형님 오늘 밤 넘기기 힘들걸.”
“근데, 네가 안 찔렀잖아. 황현진.”
똑바로 시선을 마주쳐오는 눈동자. 왜 적극적으로 혐의를 방어하지 않느냐는 질책이 담겨있다. 민호의 옷깃을 매만지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와. 진짜… 아는척은 여전하네.”
이상하게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 청소년 상담가같은 말 한마디에 배 뒤집고 꼬리 흔들 나이는 지났다고. 사실은 그때 왜 아무말도 없이 사라졌던 건지, 물어볼 용기가 없는 제 나약함이 들킬 것 같았다. 그의 눈 앞에서는 모든게 손쉽게 까발려질 것 같았다.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을 거야. 이제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현진은 충동적으로 그를 끌어당겨 입술을 맞댔다. 눈이 감기고, 감각이 어둠처럼 고요해졌다. 마치 민호와 함께 스무살을 맞이하던 그 순간처럼. 그와 보냈던 건 고작 몇개월의 시간인데, 왜 이다지도 선명할까.
일년의 마지막 날. 기숙사에 틀어박혀 그가 노트북으로 틀어준 티비로 보신각 타종 장면을 봤다. 동그랗게 말린 등을 뒤에서 푹 끌어안고서. 새해를 맞이하는 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뻤던 것 같다. 현진은 속으로 민호의 변호사시험 합격을 빌었다. 우리 형 열심히 했으니까 일등으로 합격시켜 달라고. 민호는 느릿느릿 귤을 까며 물었다.
‘어이 황. 성인 된 거 축하한다. 뭐 갖고싶은 거 있냐?’
사실은 내내 바라던 게 있었다. 정말이지 염치없게도. 그 말은 충동적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사실 알잖아 형은, 내가 형한테 바라는게 뭔지…’
내뱉자마자 후회를 했다. 이렇게 가볍게 말할 만한 마음은 아니었는데. ‘아니, 그게…’ 현진이 어떻게든 수습하려 다시 입을 열던 찰나 거짓말처럼 그가 뒤를 돌아봐줬다.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까. 늘 무표정하던 얼굴에 은근한 웃음이 어렸다.
새카만 눈동자에 티비 불빛이 아른거리던 장면. 형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발랑 까졌다고 했던가, 건방지다고 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먼저 다가와 내려감기던 긴 속눈썹은 생생하다. 역시 다 알고 있었구나. 다 들킨 지 오래라는 걸 알게 되어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형도 사실은 이날을 기다려온 게 아닐까 멋대로 짐작하면서. 그게 그와의 첫번째 키스였다.
현진은 차가운 사무실 책상 위로 반쯤 눕게 된 민호가 제 가슴을 한 손으로 밀어낼 때 눈을 떴다.
그때와 달리 지금 제 아래에 누운 건 흰 셔츠에 조금 흐트러진 넥타이를 한 어른 남자였다. 손이 가는대로 단추를 풀어헤치고 흰목에 이를 세웠다.
“야… 뭐 하는데.”
“몰라? 하고 싶은 대로. 나 원래 걸레새끼인 거 알면서 그래.”
가출청소년 시절에는 연애조차 생존수단이 되었다. 현진은 불우한 배경과 얼굴을 이용해 이성에게서 손쉽게 동정심을 이끌어낼줄 알았다. 민호는 그들과 달리 자신을 섣불리 동정하지 않아서 더 애가 타고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동정은 결국 철저한 타인에게나 쉽게 던져줄 수 있는 거니까. 마치 남과 나 사이에 선을 긋듯이. 반면에 이민호는 아무나 주던 것들 대신 아무도 못 주던 걸 자신에게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딴 거, 애초에 말이 안 됐지. 내 주제에 그렇게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현진은 정장 입은 그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워넣으며 눈을 접어 웃었다.
“형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나같은 새끼 풀어준 것도 모자라서 이런 짓이나 하고 있고.”
이민호가 유달리 제게 약하게 구는 게 아직도 여전하긴 했다. 힘주어 밀착시킨 다리를 통해 뜨거운 온도와 부피감이 느껴졌다. 저 혼자 미쳐서 달려든 건 아니라는 거였다. 애초에 이민호는 싫은 일을 억지로 참아줄 성격도 아니고, 남자끼리 서로 내숭같은거 떨어본 적도 없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짓도 아닌데. 움츠러든 무릎이 현진의 양 옆구리에 밀착했다. 옷도 벗지 않은 채 처박듯이 허리를 밀어올리면, 저절로 숨소리가 커졌다. 벌어진 입을 현진의 큰 손이 틀어막았다. 아래에서 불편하게 어깨를 비트는 걸 무시한 채 몇번 마구잡이로 몸을 치대는 동안, 깔린 팔을 빼낸 민호가 제 입을 막은 현진의 손을 힘주어 떼어냈다.
“너야말로… 무슨 생각인데…”
“뭐가요, 형.”
“부산엔 언제 왔어. 고문계약 할때부터… 다 계획된 거야? 뭘 위해서.”
또,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현진은 그의 새카만 동공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고 믿었다.
“과대평가해주니 고맙긴 한데… 윗분들 하시는 일은 나도 잘 몰라. 그만한 위치에 있진 않아서.”
말단은 원래 그냥 까라면 까는 거지, 생각이랄 게 있나. 사실 난… 유치장에서 형 봤을 때부터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F. Flame turned to ashes
늦은 밤, 번호키를 누르고 아파트로 돌아온 민호는 퍽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귀가했을 때 집에 조명이 켜져 있다는 것에.
현관에서 거실로 가는 회랑의 긴 스탠드조명. 정작 집주인은 그게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현진이 잠들기전에 켜둔 모양이었다. 슬리퍼를 갈아신고 거실로 들어서면 소파에 누운 현진이 보였다. 불과 며칠전의 촌극이 멀게 느껴질 만큼 평화로웠다. 목도리를 풀며 소파의 반대쪽 모서리에 풀썩 앉았다. 현진의 등 너머로 칠흑같은 바다와 마린시티의 불빛이 대비를 이뤘다. ‘돈을 거의 쓸어담는다더니, 진짠가봐.’ 며칠 전 제집에 처음 발을 들인 현진의 첫마디가 기억났다. 아마도 돈 되는 사건을 찾아다닌다는 민호의 평판을 비꼰 것이었겠지만. 일부러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집을 구했는데 바쁘게 살다보니 이렇게 창 밖을 유심히 보는것도 오랜만이었다.
하여튼 얜 옛날부터 한번 잠들면 업어가도 모르지. 희미한 불빛에 비친 자는 얼굴이 퍽 온순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참 종잡을 수 없는 애다. 실형을 받든 말든 관심없다는 식으로 굴다가도 문득 불안한 눈빛을 하고, 내내 가시돋친 태도이면서도 제 집에 와있으란 한 마디에 순순히 며칠째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황현진. 그가 전혀 협조해주지 않아 조사준비는 여태 제자리걸음이었다.
현진이 대화를 회피하는 것에 한가지 이유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와 터놓고 소통하려면 결국 한번은 과거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설명해본들 뭐가 달라지는 게 아니거니와, 현진이라면 제 사정을 이해해주려고 할 것 같아서였다. 그가 선뜻 양해할 일이 아닌데도.
며칠째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요약하자면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5일간의 변호사시험이 끝나고 고사장을 나오며 핸드폰을 켰을 때 동생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는 것.
‘이민호씨 되시죠? 저, OO대학병원으로 좀 와주셔야 되겠습니다.’
그 전화를 받은 날부터 민호의 인생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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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진군이 위독합니다.
새어머니의 아들이라 친동생은 아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세상에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 세진은 고등학교 졸업 전에 생산직으로 취업해 공장에서 제공되는 지방의 기숙사로 내려갔다. 민호가 반대하며 대학에 가라고 했지만 단호했다. 나 어차피 공부엔 취미 없는 거 알잖아, 형. 제가 동생이면서도 돈을 먼저 벌고 있다는 이유로 오히려 형에게 용돈을 주고 싶어하던 어른스런 애였다. 돈 열심히 모아서 세계일주를 가고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자살을 시도했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역 경찰은 민호와는 생각이 달랐다. 세진의 우울증 약 복용 기록과, 몸에서 별다른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건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세진이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다 수문이 열려 바닷물이 가득차 있던 도크에 스스로 빠졌다는 것이었다. 세진이 중태에 빠진 이상 그걸 반박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의 민호는 그저 뭐라도 알고싶었다. 동생이 물에 빠진 게 무엇때문인지, 만약 자살 시도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걸 알아내지 못하고서는 잠을 잘수도 밥을 먹을수도 없을 것 같았다.
손바닥만한 기숙사 방에서 가져온 동생의 일기장에는 대기업 협력업체 직원으로서의 고단함이 가득했다. 재계약을 빌미로 정규직보다 많은 양의 업무를 소화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공장이 아니라 발주업체인 조선소에 가서 허드렛일을 해주는 경우도있었던 것 같았다.
경찰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시도이므로 별도의 수사가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그 원인이 되었을 지 모르는 공장 측 책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민호는 공장과 원청을 고소했다. 하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일이 많아 바빴을 뿐이지 부당한 지시나 인격모독이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통상적인’ 업무지시에 불과하다는 거였다. 모든 곳에서 비슷한 수준의 착취가 이루어지면 그 착취는 관행이 되고, 그게 ‘통상적’인 수준이었다는 이유로 면죄부가 되는 세상이었다. 민호는 세진의 동료들에게 증언을 부탁했지만 모두 아직 재직중인 직원들이었기에 미안하지만 어렵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찻집에서 오래도록 민호와 마주앉았던 과장의 주름진 얼굴에서 괴로움이 보였다.
‘미안합니다. 애들이 아직 대학 졸업을 못했어요.’
그가 전해준 그나마 의미 있는 정보는 지역 경찰이 지금까지 일어났던 산업재해 사건에서 늘 공장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왔다는 사실이었다. 유착의 민낯이 거기에 있었다. 결국 사건은 6개월만에 불기소로 종결되었다. 그래도 민호는 멈출 수 없었다. 사람이 식물인간이 됐는데, 어떻게 아무도 책임을 안 질 수가 있어.
한달이 넘게 공장 문을 두드리다 쫓겨나길 반복하던 즈음이었다. 정문 경비원이 반쯤 폐인이 된 민호를 불러 떨리는 손으로 USB 하나를 건넸다.
‘이게 무슨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은… 이제사 줘서 미안하요. 내 도무지 용기가 없어가 그랬소.’
퇴직을 앞두고서야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고, 70에 가까운 노인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늘 자신에게 눈을 마주치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던 순한 청년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런 사소한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는 서둘러 자리를 뜨며, 근무자들의 실제 근무내역이 공장의 공식 기록과는 다르다는 말을 남겼다.
USB에는 공장 측이 편집하기 이전 상태의 작업일지와, 정문을 통과한 모든 차량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고소 과정에서 민호가 받아본 공장 측 작업일지와는 달리 동생이 수당을 청구하지 못한 초과근무 기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 발견한 미심쩍은 부분은, 동생의 사고가 있던 시간대에 들어와 한시간 뒤에 나간 트럭의 출입기록이었다.
물류트럭은 짐을 싣고 와서 빈 차로 나가거나 빈 차로 와서 짐을 싣고 나가는 것이 보통일 텐데, 그 트럭은 들어올때와 나갈때의 중량에 차이가 없었다. 빈차였다는 것이다. 출입기록에 남은 사진에는 희미하게 운전석과 조수석에 남자 한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차량 번호판을 기준으로 검색범위를 넓혔다.
그 결과 알게된 사실은 두가지였다. 그 트럭이 출입했던 날과 동생이 등록하지 않고 초과근무한 날이 전부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트럭의소유주로 등록되어 있던 운수회사는 사고 한달 뒤에 성원운수라는 유통업체로 흡수합병되었다는 것.
그 미약하고 불확실한 실마리.
동생의 사고 뒤에 어떤 배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희박한 가능성만이 민호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이후 민호는 오로지 그 실마리를 낚기 위한 미끼가 되기 위해 살았다. 한강 이남에서 조선소 관련 산업재해 사건에 가장 통달한 변호사가 된다면, 우연한기회에라도 사건 뒤에 조직적으로 숨은 배후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기를 선임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리에 성원운수의 뒤를 캤다.
어떻게든 더 많이 이기고, 더 비싼 선임료를 받고, 인정받아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자 했다.
그런데 뭐가 남았지.
성원운수의 크고 작은 비리에 대해서는 안다. 그 회사가 인천의 폭력조직에서 시작해 마약을 비롯한 밀수업을 통해 커졌다는 것도. 그러나 그뿐이었고, 동생과 관련된 실마리는 요원했다. 애초에 동생의 투신에 타인이 개입되어 있다는 확실한 근거조차 아직 찾지 못했다. 동생은 여전히 깨어날 가망이 없었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동생의 사고 이후, 입원절차까지 마치고 뒤늦게 현진에 대해 수소문해 보았지만 기숙사에 있던 짐을 정리해 퇴소했다는 소식만 들었다. 애초에 원생이 아니었으니 자세한 사항이 남아있을 리 없었고, 이후로는 행적이 묘연했다. 나에게 화가 많이 났겠구나. 하루아침에 혼자된 기분에 대해 짐작하지 못하는 바 아니었다. 미안해하기에도 염치가 없었지만 이따금씩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는 날 현진이 생각나곤 했다. 그렇게 내버려두고 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현진을 다시 만났을 때 금방 알 수 있었다. 숨겨지지 않는 원망과 상처. 적어도 자신은 제 의지로 선택한 길을 걷고 있었지만, 현진의 마음은 아직 그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과거에 묶여버렸구나.
로펌에서 사택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을 때 구태여 바다가 보이는 집을 요청했던 건, 한가하게 창밖 경치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혹시나 힘들고 외로워져 결심이 약해질까봐 자꾸 보고 상기하려고 그랬다. 동생을 집어삼킨 시커먼 밤바다를.
G. Glide down to nowhere
다음날 아침 민호가 출근준비를 마치고 방문을 열었을 때, 집 안은 강렬한 후각적 자극으로 가득했다. 부엌에서 소리가 들렸다. 조리대 앞에 서있던 현진이 민호를 돌아보고 인상을 썼다.
“여기서 살다간 굶어 죽겠더라.”
어떻게 된 집에 먹을게 하나도 없냐. 아직 시간 있지? 거기 앉어. 식탁 위의 밥 두공기를 물끄러미 보던 민호가 의자를 빼내 식탁에 앉았다. 장을 봐 왔구나. 제 냉장고에 있을 리 없는 재료들이었다.
“어떻게 냉장고에 김치통 하나밖에 없냐.”
“…의뢰인이 주길래 받아온 거야.”
“대체 뭘 먹고 사는 거야…”
그 김치의 존재도 사실 잊고 있었다. 그런 선물은 부담스러워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한사코 김치통을 건네며 고맙다고, 덕분에 우리 아들 살았다고 눈물짓던 이의 주름진 손. 현진이 꺼내둔 김치의 색채가 새하얀 식탁과 대비되었다. 사실 식탁에 뭘 얹어본적도 없이 살았기에 어색했다. ‘잘 먹을게.’ 그 이후로는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남았다.
마주앉은 현진도 내심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그의 집에 온 이후, 서로 제대로 마주본 일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는 아침 일찍 출근해 늦은시간에 퇴근했고 쉴새없이 일을 했다. 마치 현진과 필요 이상 가까워지는 걸 꺼리는 사람처럼. 현진도 구태여 그의 일에 협조할 생각은 없었기에 무의미한 시간만 흘렀다.
현진은 민호의 허락 하에 집안 어디든 마음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당장은 일이 없어 시간도 차고 넘쳤다. 제 사건에 대해서는, 어차피 가장 유력한 증거를 본부장이 가지고 있는 이상 결과는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게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민호의 집을 살펴볼수록 꽉찬 드레스룸과 텅빈 냉장고가 주는 극단적인 느낌에 이유모를 짜증이 났다. 청소와 집안일을 살피는 사람이 가끔 오고갔지만 식사에 대한 부분은 서비스에 포함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나치게 생활감 없는 집에선 머리카락 하나 흘리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뭐라도 어질러 보자는 마음으로 장을 봐 온 것이었다.
민호가 국을 뜨다 한마디 던졌다.
“다른 거… 뭐 필요한 건 없냐.”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알아서 잘 하네, 뭐. 이렇게 밥도 알아서 하고.”
적당히 알아서 지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그러면서 턱짓으로 소파 옆에 둔 쇼핑백을 가리켰다.
“저거, 파자마랑 속옷이고. 다른 옷은 적당히 내 옷장에서 꺼내입어.”
“장난해?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입어.”
몇백을 호가하는 수트와 비싼 시계로 가득한 그의 드레스룸을 떠올리며 현진이 인상을 썼다. 그런 걸 입고 출근했다가는 당장 ‘현진이 드디어 돈 많은 호구라도 하나 물었냐’며 난리가 날 것이다. 민호는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왜. 어차피 너도 정장 입고 일하잖아.”
“정장이면 다 같은줄 아냐? 그게 얼마짜리 옷인데.”
“…뭐, 난 잘 몰라. 걍 그럴싸하게 꾸미려고 입는 옷이지.”
변호사들은 일할 때 입는 옷을 전투복이라고 불렀다. 쉽게 신뢰를 얻어내기 위해 필요한 부차적인 기술이었다. 부산에 인맥이 전혀 없었던 민호로서는 그런 이미지메이킹이 더욱 필요했다. 옷 고를 시간이 아까워서 대충 쇼퍼에게 부탁해 철마다 옷장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렸다. 민호는 아까부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며칠째 방 없이 소파에서 지내는 현진에 대해서. 개인 공간이 필요하진 않을까 생각했지만 본인이 별 생각 없어 보였고,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 모르는데 무턱대고 가구를 사기도 뭐해서 방치한 것이었다.
쩝. 입맛을 다신 민호가 다분히 충동적인 제안을 했다.
“하여튼, 있는 거 적당히 꺼내서 써. 그리고 잠은 침실에서 자고.”
“……”
집에 침실이라고 부를 방이 하나뿐이란걸 아는 현진이 멈칫했다.
“내가 데려왔고, 눈치준 적도 없는데 왜 굳이 군식구 행세야. 너 때문에 거실에서 티비를 못 보잖아.”
“… 나 참, 밥값 한번 넉넉하시네.”
그렇게 해. 난 간다. 민호가 식탁 의자에 걸쳐뒀던 코트를 집어들고 휙 떠난 뒤로도 현진은 한참동안 식탁에 앉아있었다.
H. High and low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했다.
현진은 일기예보가 나오는 티비를 끄고 침실로 들어왔다. 혼자 남은 집은 적막했고 민호에게서는 밤이 늦도록 소식이 없었다. 바람이 심한 날이면 이렇게 밤새 파도가 방파제를 때렸다. 비싼 아파트가 방음이 왜 이래. 집 지키는 개가 된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 이불을 끌어올려 덮고 억지로 눈을 감으려는데 전화가 왔다.
발신인 이민호. 가슴이 조금 울렁거렸는데, 막상 들려온 건 낯선 목소리였다. 택시기사라고 했다.
- 저기, 이분 약주를 많이 하셨네. 깨워 봤는데 도통 일어나질 않아요. 이 날씨에 이렇게 두고 갔다가는 큰일 치르지 싶은데…
난감한 목소리에 일단 외투에 팔부터 끼워넣었다. ‘어디시라고요?’ 잠시 뒤 문자로 받은 주소에는 동호수가 없었다. 주택인가? 길게 생각할 것 없이 키를 챙겼다. 영하의 날씨에 어디서 취한 채 돌아다니는 건지.
광안대교를 반쯤 지날 때 뜬금없이 생각이 났다. 아, 바이크 타지 말라고 했었는데. 다음 순간 그게 벌써 몇년전 일이라는 자각이 따라왔다. 한숨을 쉬며 속력을 높였다. 그를 다시 만나고 나서부터 옛날 생각이 너무 자주 난다.
주소는 서구 산복도로의 재개발 예정지역 한복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진은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해서도 한참 헤맸다. 이미 철골과 공사천이 둘러져 있는 좁은 골목길은 구별이 어려웠고, 큰길에서 빠져나온 뒤로 끝없이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오토바이는 골목길 어귀에 대놓고 비좁은 계단을 건너뛰었다. ‘공가 출입금지’ 너덜거리는 노란 경고판과 더러 깨진 유리창들. 바로 옆 블록에 우뚝선 유명 브랜드 아파트의 조명은 이 동네까지는 닿지 않았다. 여긴 어딜까. 취했다고는 해도 실수로 부를 만한 주소가 아니다.
지도 어플의 목적지가 가리킨 곳은 불 꺼진 이층 주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한,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현관 돌계단에 엉망으로 주저앉은 이민호. 아침에 입고 나갔던 얇아빠진 초콜렛색 코트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가버린 현진이 그를 힘주어 일으켰다. 코를 찌르는 술냄새와 축 쳐진 고개는 처음 보는 모습이다.
”아저씨. 술버릇이 생각보다 진상이네.”
“……ㄴ아…”
“뭐라고?”
“진아…”
어깨에 툭 기대오는 차가운 머리카락. 현진은 그 부름을 자신에 대한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다. 형은 한번도 자신을 그렇게 부른적 없었으니까. 그 이름과, 그 이름에 얽혀있던 유치한 질투가 기억났다. ‘진이’는 민호가 친애해 마지않는 동생이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취업을 했다고 자랑하며, 전화를 받을때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얼굴을 하게 만들던. 어엉 진아. 밥 먹었어? 현진은 남몰래 시기했다. 친동생도 아니라면서. 어차피 피 한방울 안 섞인 남인 건 똑같은데 왜 걔만 ‘진이’인지 항의하고 싶었으나 제가 생각해도 염치가 없어 말 못했던 기억.
아마도 그는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온듯 했다. 절반 이상이 빈집인 재개발 예정지여도 아직 불 켜진 집들이 천막 사이로 띄엄띄엄 보였다. 이 집에도 아직 그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층짜리 주택은 아직 아름다운 외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이 집에서 평화롭게 자랐겠지, 이민호와 그의 동생은. 집의 창문들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자나본데. 불러줘? 진이.”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은 봐야지. 나도 한번 보고싶네. 그랬더니 민호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웃었다.
“아냐, 걘… 이젠 나랑 말 안 해줘… 나쁜 놈.”
몇년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진이’와 사이가 멀어졌을 것은 이미 짐작했다. 부모의 재혼으로 만들어진 가족이니 부모가 없어진 이후에 소원해졌대도 이상할 건 없었다. 뭣보다 부양할 가족이 있다면 이민호가 저렇게 살지는 않을 것 같아서.
이민호의 집은 정말이지 징그러울 정도로 호사스러웠다. 그러나 동시에 인형의 집처럼 공허했다. 이유는 구태여 알고 싶지 않았다. 저 따위가 잘 살고있는 그를 멋대로 평가할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도 했고,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진이’의 부재를 이유로 이민호가 황폐해졌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워낙 외딴 곳이라 어플로 택시를 불러도 잡히지 않았다. 민호를 일으켰지만 몇발짝 제대로 걷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이민호. 결국 그를 들쳐업고 경사로 아래까지 한참을 걸어내려갔다. 누군 힘들어 죽겠는데, 민호는 업어주는 사람의 목을 야무지게 끌어안고 편안한 자세를 잡았다. 둘의 입김이 하얗게 섞였다.
거리로 뛰어나가다시피 해서 겨우 잡은 택시에 민호를 밀어넣었다. 일단 같이 타고, 바이크는 내일 찾으러 오면 되겠지. 널브러진 민호의 코트 단추를 몇개 풀어주는데 갑자기 말을 걸었다.
“야… 황현진.”
“왜요.”
“너 임마. 오토바이 타지 말라니까.”
또 오토바이 탔지… 옷에서 바람냄새 나. 민호는 몇마디 중얼거리다 차 안의 따뜻한 공기에 녹아 스르르 잠들었다.
그 말에 현진은 또다시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난 뭘 하려고 형에게 다시 왔더라. 그간 속상했던 만큼 미워하면 속이 시원할것 같은데. 왜 한편으론 자꾸 형 같은 사람에게도, 자신처럼 영영 메울 수 없는 큰 구멍이 있는 게 아닐지 들여다보고 싶어질까.
I. I think I know you
취한 사람 시중 드는거야 조직에서 막내로 몇년을 굴렀던 현진에겐 별스러울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뻔뻔한 취객은 처음이었다. 어젯밤 축 늘어진 몸을 이고 들어와 속옷까지 싹 갈아입혔는데 저 아저씨는 민망함이란 걸 모르나? 뜨거운 수증기를 내뿜으며 샤워실에서 나온 민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른하고 상쾌해 보였다. 오전 일정이 없는 모양인지 샤워가운 차림으로 여유를 부렸다.
근처 식당에서 배달시킨 북어국을 나눠먹다가 민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제 차키를 건넸다.
“뭔데.”
“너 오늘 운전 좀 해라. 아니, 그냥 당분간 네가 좀 해. 면허 있지?”
“뭐래. 기사도 있으시면서 왜 날 부려먹지.”
“그때 판사님 말씀 못 들었어? 당분간 내가 네 보호자야. 어디 가서 허튼짓 할 생각 말고 기사나 해.”
“…웃기네. 어제 술 먹어서 운전 못하니까 그런 거지?”
“잘 알면서 왜 묻냐. 짐 간단히 챙겨. 자고 와야 돼.”
그러고 보니 원래 이렇게 좀 괴짜같은 인간이긴 했어.
현진은 무작정 출발시간을 통보하는 민호를 흘겨보면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어 얼떨결에 짐을 챙겼다. 광주에서 이틀 연속으로 변론이 잡혀 있다나. 부산에서는 전라도에 직행으로 가는 고속열차가 없어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숙박하는 게 낫다는 둥, 이어진 설명같은 건 대충 흘려 넘겼다.
-
현진은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회색 제네시스를 보고 투덜거렸다.
“뭐야, 부산에서 제일 잘 나가는 로펌이라더니 외제차도 안 줘?”
외제차를 몰아볼 생각에 설레었던 건지 입술이 튀어나와 있는 걸 보고 민호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걸 보면 애는 앤가. ‘아니, 김앤장에 들어갔대도 파트너도 아닌 어쏘 나부랭이한테 외제차를 뽑아주겠냐. 하여튼 우리나라 법정물 드라마들이 법조시장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왜곡시킨다니까.’ 설명을 덧붙여 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참 나. 됐고, 여튼 운전 예쁘게 해라. 나 일 좀 하게.”
현진은 민호더러 옆에 앉아봤자 신경만 쓰이니까 편히 뒷자석에 앉으라고 했지만, 회장님 행세할 일 있냐며 고집을 부려 조수석에 앉았다. 가방을 뒤적거린 민호가 두꺼운 기록을 꺼냈다. 그가 꺼내 쓴 낯익은 안경을 현진이 몰래 힐끔거렸다. 팔락팔락 기록넘어가는 소리만 차안을 채웠다.
민호는 오늘도 사치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칼같이 떨어지는 싱글코트와 셋업 수트, 꽉 조인 넥타이, 번쩍대는 커프 링크스. 그래도 몇번 봤다고 그 차림이 이젠 눈에 익었다. 사실 눈으로 보기에 그런 스타일이 안 어울리는 편은 아니지. 그저 현진 자신이 알고 있던 이민호의 이미지와 맞지 않았을 뿐이다. 제 마음대로 정해둔 틀에서 그가 벗어났다는 이유로 화가 났던 거다. 돈 받고 회사에서 시키는 일 하는게 뭐 어떻다고, 다들그러고 사는데 왜 이민호만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현진 스스로도 이유를 몰랐다.
차는 인터체인지를 지나 낙동강을 건넜다. 며칠째 겨울비가 내리더니 간만에 날씨가 개었다. 개방된 낯선 공간, 햇빛과 바람이 주는 안도감에 현진의 자세가 저도 모르게 느슨해졌다. 오랜만에 아무런 잡생각 없이 눈앞의 풍경을 보게 되자 슬쩍 들뜬 현진이 먼 곳에 시선을 줬다.
그렇게 고속도로에 진입하고도 한참이 지났을 때, 문득 옆자리에서 종이 넘기던 소리가 멈춘 걸 알았다. 돌아보니 빤히 바라보고있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어이, 앞에 봐야지. 위험하게.”
“뭐. 왜 쳐다보는데.”
“새삼 신기해서. 운전을 다 하네. 애기였는데.”
“… 무슨. 그럼 형은 애기랑 그런 걸 했냐?”
그런게 뭔데, 임마. 민호는 설핏 웃다가 여상히 고개를 내려 다시 기록에 밑줄을 그었다. 현진이 저도 모르게 파드득 반응한 건 민호의 시선이 마치 예전처럼 다정한 기운을 띄고 있어서였다. 하긴, 민호로서는 애랑 뭘 했냐는 유치한 비난에 타격을 받을 리 없었다. 제가 아무리 질척거려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손 한번 마주 잡아주지 않았었기 때문에.
흥, 떳떳하셔서 좋겠네. 괜히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
두시간 반만에 도착한 광주는 어제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얬다.
광주지방법원 화단의 오래된 나무들에도 푹신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현진은 그를 뒤따라 법정까지 들어갔다. 대부분의 재판은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개되어 있으니 안될 건 없었다. 민호는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차 안에서 기다리느니 기록이나 들라고 했다. 이젠 숫제 비서 취급이었다. 법정 문을 열기 전에 한 가지를 당부했다. ‘사건 당사자들 얼굴은 되도록이면 보지 마.’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아니라는 뜻에서겠지.
첫번째 사건은 기계 끼임사고의 피해자가 공장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었다. 피해자 측 대리를 맡은 이민호는 준비해온 피피티를 열어 현진조차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피해자가 기계에 손을 넣어 작업하는 동안 다른 근로자가 실수로 작동버튼을 눌렀다는 것,
공장 측에서는 그 작동버튼을 피해자가 스스로 눌렀다고 했지만 피해자의 작업반경과 버튼까지의 거리를 측정한 결과 피해자가 그 버튼을 누르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그날 기계의 비상 중단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
재판은 건조한 분위기에서 끝났기에 현진이 우세를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법정에서 나오자마자 상대방 변호사가 그를 급히 따라왔다.
“저기, 이변호사님. 혹시 합의가 가능하실까요.”
“글쎄요. 먼저 제안을 보내주시면 의뢰인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으음… 네. 내일 중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명함을 교환한 두 변호사는 참 쿨한 악수를 남기고 갈라섰다. 상대편에선 누구나 들어서 알 법한 유명한 로펌에서 여러명의 변호사들이 나왔다. 그들이 심각하게 의논하며 다른 쪽 복도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현진이 민호의 어깨를 툭 쳤다.
“이긴 거지, 그럼?”
“글쎄.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지.”
“잘난척 하긴. 저 아저씨 얼굴이 사색이 됐던데.”
“모르겠다. 돈으로 해결이 되는 문제라면 다행이겠지만.”
민호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현진은 피해자가 20대의 나이에 한쪽 손을 잃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하긴, 얼마를 받는대도 그런 일에 대한 위로가 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치만 형, 어차피 억울하고 화날 일이면 돈이라도 왕창 받는 게 나아.”
“그건 그렇긴 하지.”
“그분한텐 위로가 됐을 거야. 다른 사람이… 자기 대신 그렇게 화내 줘서.”
“나 화 안 냈는데.”
“거짓말.”
“돈 받고 하는 일이지, 화 내고 그런게 어딨냐. 프로의 세계에.”
이민호는 그렇게 눙치고 현진의 손에서 기록 가방을 빼앗아 다음 재판이 잡혀있는 법정으로 걸어가 버렸다.
거짓말. 같이 화내고 억울해 했으면서.
민호가 매일밤 서재방에서 한숨을 푹푹 쉬며 기록을 들여다보고, 방금 봤던 피피티를 고치는 걸 봤었다. 그는 늦은 밤에도 의뢰인과 전화로 의견을 나누고, 때로는 저런 이야기까지 들어줘야 하나 싶은 의뢰인의 사담까지 들어주는 성실한 변호사였다. 남한테 들은 소문과 그의 외양만으로 현재의 그를 쉽게 속단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
마지막 재판을 마치고 법원에서 나오던 길에 오늘 승소판결을 받은 의뢰인과 마주쳤다. 잠시 상담이 가능하시냐는 정중한 물음에 현진은 먼저 차에 가있기로 했다. 법원 앞 다방에 민호와 마주앉은 중년의 여성은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부터 했다. 정말, 변호사님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하긴요, 제 일인데요.”
“제가 평생 공장 일을 하다보니 친구들 중에도 더러 소송 해본 애들이 있어요. 들어봐도 변호사님처럼 정성스럽게 봐주는 분은 없더라구요. 저는 어쩌다 복이 많아서 변호사님을 만났네요.”
“주변에 소개도 좀 해 주시죠 그럼.”
“하하, 아유. 지금도 사건이 차고 넘치시면서, 괜히 그러신다 또.”
웃으며 차를 마신 의뢰인이 조금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저기, 변호사님, 거제 쪽 산재사건도 많이 하신다고 그랬죠. 사실 이 얘기 해드리려고 귀한 시간 뺏었네요.”
“예, 중공업 쪽 사건도 있고, 조선소 사건도 있고 그렇죠.”
“아휴,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되나. 제가 그쪽에서 노조 일하던 친구한테 들었는데요, 조선소랑 무슨.. 어디 조폭들 간에 커넥션이 있는 것 같다네요.”
“커넥션이라면 어떤…?”
“말 그대로, 조폭들이랑 같이 하는 무슨 사업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어떤 작업장에는 낮에도 건달들이 더러 돌아다닐 정도래요. 변호사님은 근로자 쪽에 서실 때가 많으니까 혹여 험한 일에 안 휘말리게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제가 참견할 일 아니지만, 아들 가진 입장에서 걱정이 되어서… “
“…아뇨,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혹시 무슨 연유로 폭력조직이 개입했는지는 못 들으셨구요?”
“아유 저야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지요. 노조에선 회사에 항의도 하고 그랬다는데,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뗐다나요.”
성원운수일까? 민호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전까지는 성원운수가 일부러 실체를 속이고 현장에 들어갔을 가능성을 가장 높게 보고 있었다. 민호가 의심하던 쪽은 오히려 세진이 일하던 하청업체로, 아마 납품 자재를 빼돌리는 비리와 연관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조선소 입장에서야 조폭인 걸알면서 협력해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조선소가 직접 조폭과 연관된 일이 있었다니.
조선소와 폭력조직 사이에 협력할 만한 무슨 이권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제가 간과했던 부분이 있는 듯 했다.
J. Je te veux
“…저기, 혹시 형네 회사 좀 힘든가?”
호텔에 들어선 현진의 첫마디가 그랬다. 좁고, 풍경이랄 것도 없고, 인테리어도 칙칙했기 때문이다. 출장으로 이 호텔에 자주 와봤던 민호는 아랑곳않고 짐이나 풀고 신발이나 벗었다.
“출장용으로 예약해준 비즈니스 호텔에 뭘 바라냐.”
“침대는 또 왜 트윈도 아니고 더블인데.”
“1인 출장이니까. 트윈을 주는게 더 이상하지.”
“뭐야, 그럼 기사님이랑 다닐 때도 더블침대 써?”
“미쳤냐… 그땐 따로…2인… 아, 피곤해피곤해. 비켜.”
집에서도 같이 자면서 왜 유난이야. 그러더니 코트와 타이만 훌훌 벗곤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현진이 기겁을 했다. ‘아, 더럽게. 같이 쓰는 침대인데 옷도 안 갈아입고 뭐 해?’ 당장 씻으라며, 이리저리 실랑이하다가 민호가 몸에 힘을 주고 버티는 통에 못 이겨서 포기했다.
어우 진짜 왜케 힘이 세… 힘이 다 빠진 현진도 결국 침대의 다른 귀퉁이로 쓰러졌다. 모르겠다… 이왕 더러워진 침대. 어차피 이불 바깥면이니까 괜찮겠지. 방이 조용해지니 창밖에 이따금씩 지나가는 차 소리, 눈을 감은 민호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피곤하겠지, 세시간을 달려와 하루종일 일을 했으니.
광주천 근처에 위치한 호텔의 고요함은 오는 길에 지나쳤던 충장로의 번화가와 딴판이었다. 난생 처음 와본 광주가 엄청나게 큰 도시여서 현진은 내심 놀랐다. 광역시라 그런가, 높은 건물도 많고 길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렇게 자신이 모르는, 어쩌면 앞으로도 평생 가볼 일 없는 도시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겠지. 가끔 그런 생각이 들면 어쩔 수 없이 쓸쓸해졌다. 앞으로 자신에게 허락될 삶의 경계선이 그리 넓지 않단 걸 알아서. 운이 좋다면 지금까지처럼 시시한 일이나 하며 늙겠고, 운이 나쁘다면 버거운 일을 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지. 여한같은 건 딱히 없지만, 만약 딱 한가지 미련을 꼽는다면…
불현듯 든 생각에 옆으로 데굴 굴러 민호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덩치 때문에 제대로 안길 수도 없는데 기어이 그의 팔을 들어 옆구리쪽에 제 몸을 구겨넣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 또 언제 이렇게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데.
눈을 뜬 민호는 제 품에 야무지게 고개까지 파묻은 현진을 어이없어했다.
“뭔데 갑자기 끼를 부리지. 아깐 더럽다며.”
“나도 더러우니 됐어.”
현진의 얼굴은 고집스레 민호의 가슴에 파묻혀 있었고, 민호는 투박한 손길이나마 그의 머리를 옛날처럼 쓰다듬어 줬다. 그 익숙한 습관 때문에 현진이 울고싶은 기분이 되었다는 건 모른 채로.
“현진아. 뭘 어쩌고 싶은거야 넌. 사건 얘기는 매번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주고.”
“모르겠어…”
“모르겠다고만 하네.”
민호를 생각하면 현진은 자주 서러워졌다.
사실은 그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많은 것들… 그의 동생과, 그를 신뢰하는 의뢰인들, 동료들에게 다정했다. 그런데 나한테만 왜 그랬지. 그게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냥 여전히 그가 좋았다.
그간 현진이 조직의 중책에 있었던 것은 아니어도 일을 하다보면 가끔은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런 순간을 몇번 겪고 나서는 발상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보다 심플해졌다. 언제 마지막이 오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아무것도 미루지 않게 되었다.
“나, 형한테 화났던 게 아니었나. 그냥 보고싶었던 건가봐. 이젠 알겠어.”
“……”
고개를 들면 금세 눈이 마주쳤다. 사심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
“형. 목숨 내놓고 사는 일에도 좋은 점이 있다. 뭔지 알아?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면 우선순위를 걸러내는게 쉬워지거든.”
현진은 더 이상 버림받은 피해자 행세를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형이랑 있고싶어. 잠깐이어도 좋으니까.”
나도 형한테 의미있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그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외의 다른 아무것도 사실은 상관 없었다. 설사 그게 어설프게 묻어둔 우리 자신의 과거이더라도. 만약에 결국 이민호를 이해하는데 실패하더라도. 영영 아무것도 설명듣지 못하더라도. 현진이 눈을 감고 입을 맞추면, 예전처럼 다정한 손길이 턱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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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홧김에 그를 안았던 집무실에서와는 달랐으면 했다. 마음만큼 다정하게 대해야지. 원래부터 현진은 강압적인 관계는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를 끌어안고 있으니 슬픈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이런 것도 어리광이겠지. 받아줄 사람이 있으니까 저도 모르게 자꾸 약한 모습이 튀어나오는 거다. 내내 현진의 목에 양팔을 두르고 있다 이제 겨우 숨을 돌리던 민호는, 어깨를 적신 심상치 않은 습기에 현진의 얼굴을 확인했다.
“또 멋대로 형 깔아놓고는. 울긴 왜 네가 울어.”
“…가끔 보면, 형이 나보다 더 양아치처럼 말하는 거 알지.”
퉁명스런 말과는 달리, 민호는 제 위에서 뚝뚝 떨어지는 현진의 눈물과 땀을 손으로 닦아줬다. 아깝고 예쁜 것을 만지듯 눈썹과 코, 뺨을 만지작대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그러면 현진의 푹신한 입술도 민호의 얼굴 여기저기에 도장을 찍었다.
현진은 민호가 저녁내내 해야 할 말을 고르느라 머뭇대고 있다는 건 알아채지 못했다. 순간의 실수로 과오를 인정했다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직업에 종사한지 오래되어 그런지, 솔직한 사과의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출장에 현진을 데려오면서 터놓고 대화할 기회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현진이 먼저 선뜻 마음을 열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도 상대방의 마음을 최대한 선해하려는 시도는 결국 감정적 약자로서의 체념일지도 모른다. 민호는 현진에게 그런 역할을 줄 마음은 없었다. 제 옆에 누워 잠시 눈을 감고 있는 현진에게 이불을 덮어줬다.
“눈 뜨지 말고 그냥 들어. 듣다가 자도 좋고.”
서로가 가장 연약해지는 순간이 되어서야 용기를 쥐어짜낼 수 있다는게 참 못나지만.
“동생 얘기, 내가 얼핏 한적 있었을 거야.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남에게 한번도 한 적 없는 이야기라 그런지, 답지않게 횡설수설했다. 고작 미안했다는 말 한마디를 하려고 긴 설명을 하게 되는것도 사실은 성격 탓이지만. ‘왜’에 대한 답을 해 주고 싶어서라고 해 두자. 현진은 민호가 변호사시험 마지막날 사라졌던 이유를 듣는 동안 저도 모르게 눈을 뜨고,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이해해줄 일이 아니라는데도.
“방을 치우러 갔더니, 발 디딜 틈도 없이 물건이 가득 차 있더라. 걔 혼자서는 방을 치울 기력조차 안 남을때까지 닳아버렸던 거야.”
일상적인 활동을 못 하게 되는 게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라는 설명도 들었어. 그래도 그냥 ‘그렇구나, 자살 시도구나’하고 인정할 수가 없더라. 걔가 그렇게 매일 일기를 썼는데도 나에게 유서 한장을 안 남겼다는 걸 믿을 수 없었거든. 그땐 그게 꽤 객관적인 반론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내 진짜 이유를 찾으려고 했던 거야.
그런데 그런 시도는 사실, 그냥 나를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버려졌다는 걸 받아들일수 없어서. 걔가 스스로 세상을 포기했다면 나도 버린 거니까. 이기적이지만 내 입장에선 버려진 기분이었어. 그래서 네가 무슨 기분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하면 오만한 소리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널 빨리 찾아내지 못해서 미안하다.
현진은 오랫동안 그에게서 이런 사과나 설명을 듣기를 바라왔었다. 그런데 제가 해왔던 상상과는 달리 응어리가 풀린 후련함이 선명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뭐랄까. 안타깝고 측은했다. 제 주제에 형같은 사람을 동정한다고 하면 다들 비웃겠지만.
형이 돌아가고 싶어하는 곳은 이제 없어져 버렸구나. 술에 취해 예전에 살던 집앞에 앉아있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동생은… 요즘은 어떤데.”
“글쎄, 솔직히 말하면 눈에 보이는 차도는 없어. 언젠가 일어나주길 바라고는 있지만.”
민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부터 물어보는거야? 작은 손이 현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변명인 거 알지만, 몇달 뒤에 널 찾아보려 했는데 쉽지가 않더라. 부산으로 내려왔을 줄은 몰랐지.”
성원에 있는 줄 알았다면 쉽게 찾았을 텐데. 사실 예전부터 성원 쪽을 조사하고 있었거든. 처음에 너한테 과민하게 반응한 것도 그래서야. 사실 성원이랑 제휴관계를 의도했던 건 내 쪽이면서, 네가 뭘 알고 왔나 해서. 민호는 가벼운 어투로 말했지만, 현진은그 말에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그럼… 우리 회사가 연관되어 있는 거야, 동생 일에?”
“그럴 것 같긴 한데. 꼭 성원이 타겟인 건 아니야. 생각보다 복잡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좀더 조사해 보려고.”
“…조심해 형.”
“표정 풀어. 네가 아는 일도 아니면서. 네가 조금만 중요한 일 하고 있었어도 바로 알았을거야.”
명지 공사판에서 트럭기사들 관리나 하고 지냈던 거 안다며, 민호는 대수롭잖게 여겼지만 현진은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형은 모르는 일이 있어.
현진은 본부장이 내린 지시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민호를 가까이에서 조사하고 보고하는 대가로 제 혐의를 벗겨 주기로 한 약속을. 그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애초에 왜 이민호였을까?
K. Kill your darlings
다음날, 다시 먼 길을 운전해 돌아온 부산에는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민호는 집으로 가기 전 들를 곳이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굳이 차를 주차장에 대놓고 택시를 탔다. 별다른 설명은 없었지만, 행선지를 법인차의 네비게이션 기록에 남기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현진은 일주일 단위로 루틴화된 그의 일정에서 드문드문 빈 곳이 있다던 본부장의 말을 떠올렸다. 이렇게 조심성 많은 성격이라 그랬구나. 대놓고 사람을 붙여 미행하지 않는 이상 추적이 힘들테니까.
도착한 곳은 외딴 산중턱에 있는 요양병원이었다. ‘진이’는 여기에 있는 모양이었다. 코로나 감염 우려 때문에 면회는 한명밖에 허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현진은 로비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통창으로 보이는 능선을 따라 산안개가 천천히 흘렀다.
이민호가 동생의 병원에 몰래 오가는 이유.
아마 최대한 동생의 존재를 외부에 노출하지 않으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가 민호의 동생인 걸 알게 된다면 이민호가 조사하고 있는 일의 목적을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둘은 피가 섞이지 않은 관계였으니, 만약 부모님들이 재혼하면서 호적을 합치지 않았다면 서류상으로는 남남일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결론은 심플해졌다. 민호가 이복동생의 병문안을 다닌다는 점을 포함해서, 그가 일부러 숨긴 행적을 그대로 본부장에게 보고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느라 민호가 걸어나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어, 금방 나왔네.”
나 때문이면 안 그래도 되는데. 다가가면, 민호의 눈이 아까보다 조금 빨갰다.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놀란 현진이 그를 조심스레 끌어당겨 안으면 평소보다 짧은 호흡이 느껴졌다. 민호가 어깨쯤에 이마만 살짝 기댔다.
“무슨 일 있었어?”
“상태 안 좋아진 건 아까 전화로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길 준비 하래. 호스피스 입원하고 평균 생존기간이 얼마인지 알아? 한달도 안돼.
민호는 그 뒤의 말을 잇지 못했다. 울지도, 주저앉지도 않고 그저 꼿꼿하게 선 그의 등을 현진이 가만히 쓰다듬었다. 나라도 계속곁에 있어주겠다는 말을 해 주면 좋겠지만… 할 수 없었다. 이제 무엇도 약속할 수 없는 처지니까.
현진은 새벽에 본부장과 전화를 했었다.
‘이민호 별거 없어요, 본부장님. 시외 출장까지 따라나와 봤는데, 그냥 평범합니다.’
- 그래, 그러냐.
‘이번에 준비하시는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제가 다시 현장 뛸게요. 차질 없게 잘 하겠습니다.’
본부장의 통제광적인 성격상 뭔가 미흡한 부분이 생기면, 그만큼을 벌충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호가 알아보는 일들이 성원의 뒷조직을 향하게 되면 제가 먼저 알아채고 커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고작 이거였다. 여전히, 가진게 제 몸뚱이 하나 뿐이라서.
현진이 다시 조직 쪽 일을 하겠다고 자원하자 본부장은 티나게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현진이 늘 ‘현장 일’을 기피하고 한직으로 나도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였다. 대번에 그에게 새로운 일을 제안했다. 중국 쪽에 오래 나가있던 행동대장 한명이 요즘 들어 자꾸 귀국하고 싶다는 뜻을 비쳐 곤란하다고 했다. 그 자리를 맡으면 어떻겠냐고.
운반책, 행동대장.
그게 뭘 하는 자린지 현진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멀쩡한 대한민국 호적을 가지고 할 만한 일은 아닐 터, 아마도 밀입국을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을 쓴다면 국내 사망으로 처리하고 위조 신분을 만들게 될 것이다. 어찌되었든 민호와 다시 만날 일은… 아마도 없겠지. 만약 정말로 그의 동생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나까지 없어지는 게 혹시 형에게 버겁지는 않을까. 그런 건 제 주제넘은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사실은 재회조차 짧은 시간일 뿐이었으니, 그저 각자의 자리를 찾아간 거라고 생각해 주기를.
-
며칠 뒤, 현진의 두번째 경찰 조사는 첫번째와는 사뭇 달랐다. 일단 이번엔 밤중에 끌려들어가는 게 아니고 환한 대낮에 변호사를 대동하고 정문으로 걸어들어갔을 뿐 아니라,
“어어 현진씨. 여기 앉고. 우리 변호사님은 여기, 옆에 의자에 앉으시고.”
담당 경찰이 바뀌어 있었다. 지난번 현진에게 명함을 줬던 사람이다. 서… 뭐랬더라. 현진이 민호를 쳐다보면, 눈썹만 까딱여 응수하는 걸 보니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소환장을 받고 민호와 상의할때 그는 신문중에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사실 많지 않다고 말해줬었다. 말을 뱉고 나서는 되돌릴 수 없으니 스스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그러나 그가 옆에 앉아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됐다. 마음은 차분하고, 대답할 내용도 이미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다.
“어디보자… 저는 지난번에도 소개를 했지만, 이런 사람이고요.”
바쁘게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이 책상 위에 놓여있던 명함을 가리켰다.
‘강서경찰서 수사과 강력범죄수사팀 / 서 창 빈’
익히 받은 적 있던 명함이라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저번에는 제대로 조사를 못했어가지고, 거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겠네. 일단은… 현진씨가 정확히 몇시에 거기 도착해가, 뭘 했는지, 그것부터 정리할까요.”
민호가 파일철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 ‘변호인 의견서에 첨부할 예정이긴 합니다만, 먼저 보시죠.’ 당일 현진의 네비게이션 기록을 정리한 것이었다. 설명이 이어졌다.
“현장에 도착해서 피해자를 발견하자마자 경찰차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경찰의 현장 도착시간과는 길어야 일이분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을 겁니다.”
“흠 뭐… 그렇죠. 단순 확인 차원에서 물어본 거긴 해요. 일을 다 치고 나서 경찰이 오기 전에 옷을 갈아입었다고 할라면 시간이 안 맞그든.”
창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류를 살폈다. 민호가 어젯밤 미리 말해준 그대로였다. ‘사실 경찰에서도 네가 직접 찔렀다고 생각할가능성은 낮아. 그보다 중요한 건 너에게 공범이 있는지, 그 사람을 적극적으로 숨기고 있는지의 문제고.’ 경찰이 가져가 조사한 현진의 옷에서 혈흔 반응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고, 신고 있던 신발의 족적 역시 핏자국 위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뭐, 현장에서 다른 사람은 못 봤어요? 아니면은 따로 지목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그게… 확실하진 않은데. 의심 가는 사람은 있긴 해요.”
본부장이 가진 씨씨티비 화면은 아직 제출되지 않았다. 현진이 민호의 행적을 팔아넘기지 않기로 결심한 이상, 아마도 영영 제출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력갱생해야지. 현진이 받은 최초의 지령은 진범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두라는 것이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지시를 어긴 건 아니다. 현진이 짐작하는 범인은 이미 사건이 있던 날 밤에 배를 타고 외국으로 밀항했을 테니까. 지점장과 사이가 좋지 않고, 동시에 조직 간부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사람.
현진의 순순한 대답에 창빈의 타자소리가 빨라졌다.
“거래처 사장이었는데, 대출업체에 돈을 못 내서 트럭이 몇대 넘어갔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정이 좀 어려웠나봐요. 우리 쪽 트럭기사들을 빼내가려고 하다가 우리 지점장한테 들켜서 싸운 적이 있어요. 거긴 또 눈뜨고 밥그릇 뺏기는 타입은 아니라서요. 그… 장 사장이라고 했는데, 아마 본명은 장은수라고 했던가.”
창빈이 두꺼운 기록철에서 인덱스가 붙여진 부분을 찾아 빠르게 넘겼다.
“거래처 맞습니까? 우리가 거기 장부 싹 다 뒤졌는데, 그런 이름 없던데.”
“거기 사정 안 좋아진 뒤로는 거래를 안 했을걸요… 아, 세금 문제 때문에 빠진 이름도 좀 있을 거에요.”
“아이구. 탈세 쪽은 따로 조사 들어가겠네.”
현진이 옆의 민호를 쳐다보면, 또 눈썹만 까딱 했다. 아마 ‘뭐, 그거야 네가 알 바냐? 잘했다.’ 따위의 뜻일테다. 창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나미 플러스펜의 뚜껑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래요 뭐… 장은수. 알아봐야지. 근데 문제는, 우리가 그 시간 앞뒤로 창고 진입로 씨씨티비를 다 따왔는데 현진 씨 말고는 오고간 차량이나 사람이 전혀 없었거든. 이거는 어떻게 생각해요?”
“정문을 차로 통과하려면 거기밖에 길이 없긴 한데요.”
“아… 뭐, 그럼, 어디 비밀 통로라도? 뭐 하는 회사에요 거긴?”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요. 등산로 끄트머리에서 한 오분쯤 풀숲으로 들어가면 그 창고 뒷문이 나오거든요.”
“등산로? 그러면 거기 위치가… 어디, 대어봉에서 내려오는 쪽?”
“네. 좀 특이한 손님들은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 차 대고… 운동삼아 거기까지 걸어온다고 했어요.”
현진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창빈이 책상 위의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어, 내다. 성원 건, 대어봉 등산로 주차장 씨씨티비 확보해. 뭐 있으면 차량 수배하고, 장은수 이름 나오면 바로 영장 올리라.’ 수화기를 놓은 창빈은 그럭저럭 만족한 눈치였다. ‘뭐, 이렇게 되면 생각보다 심플하게 끝날 수도 있긴 하겠네.’ 그러면서 엔터 키와 백스페이스키를 여러번 두들기는 걸 보니 지금까지 쓴 조서를 정리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쩝, 입소리를 내며 시선이 다시 현진에게로 꽂혔다.
“아니, 근데 현진씨. 아마 법정에서도 같은 얘기가 분명히 나올 거라서 미리 해보는 얘긴데. 아아 이건 뭐, 조서에 넣지는 않을 테니까 편하게 대답해도 됩니다. 그때도 우리가 거의 비슷한 질문들을 했을건데, 그때는 왜 대답을 안했지?”
현진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현진의 옆자리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무서웠답니다.”
“뭐가요?”
“갑자기 피를 봤더니, 너무 무서워서 잠시 말이 안 나왔대요.”
창빈 뿐 아니라 현진마저도 황당한 시선을 보냈지만 발언자는 당당하게 큰 눈을 꿈뻑거렸다. 왜, 뭐. 왜.
L. Lots of reasons
며칠 후 민호와 만나게 된 사람은 성원운수의 김경섭 본부장이었다.
“이변호사님, 오랜만이지요.”
“안녕하십니까. 이쪽으로 앉으시죠.”
민호가 그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천에서 필로폰 밀수로 번 돈을 불려내 성원을 이렇게까지 키운 핵심 인물이었다. 회장이나 상무와 같은 상위 직책들은 소위 초기자본을 댄 ‘쩐주’들에게 달아준 허울 좋은 감투일 뿐이고, 성원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이 사람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은 계약 체결을 위해 법무법인의 대회의실을 빌렸고, 계약 전에 계약서를 사전 검토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거 참, 계약서 같은 건 요즘 세상에 이메일로 휘리릭 보내면 그만인데. 다 늙은이 노파심입니다.”
“별말씀을요. 중요한 계약일수록 비하인드를 설명해 주셔야 검토 포인트를 잡을 수 있죠.”
민호도 웃으며 응대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보안상 문제라고는 했지만, 사실 회의 전에 미리 계약서의 내용을 보내주지 않는 건 통상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상당히 구린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의 비서가 건넨 계약서를 받아 잠시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일단 제목은 이러했다.
‘운송계약서’
‘선박구매계약서’
‘선박리스계약서’
간단히 요약하면, 조선소는 성원에 중국 산동성에서 부산으로 화물을 보내는 운송작업을 의뢰하고, 성원은 이를 위해 배를 빌려오는 구조였다. 이제 해상까지 사업을 확장하시겠다? 민호의 인상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대형 화물을 운송할때 더러 사용하는 방식으로, 마치 트럭에 짐차를 연결하여 끌듯 예인선 뒤에 바지선을 띄워 물건을 운반할 예정이었다. 선박 구매비용을 아낄 목적으로 캐피탈 회사와 일종의 임대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계약의 구조나 내용자체에 큰 문제는 없었고, 조건도 통상적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검토를 의뢰한 성원 측 입장에서 유리한 조항과 불리한 조항을 솎아내던 민호가 문득 한 조항을 지적했다.
“리스계약 이후에 배를 인수할 예정은 없으신 겁니까?”
유독 그 부분에서 성원과 캐피탈 회사 쪽 입장을 반영하느라 여러번 수정된 흔적이 보였다.
“여기, 캐피탈 회사에서 보낸 초안을 보시면, 계약 종료시에 귀사께서 선박을 인수하시는 조건이 귀사에 훨씬 유리합니다.
그런데 이 조건을 수정하면서… 그러니까 인수가 아니라 배를 캐피탈 회사에 반환하는 조건으로 바꾸고, 사고에 대한 면책조항을 넣으면서 리스요금이 확 상승하거든요.”
“그 배를 저희가 사와봤자 뭐 하겠습니까. 관리하느라 공연히 비용만 들지요.”
본부장은 조선소같은 큰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처음이고, 비슷한 일이 앞으로도 많이 들어오면 몰라도 일단은 위험부담을 줄이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설명했지만 깨끗하게 납득되지는 않았다. 민호는 그의 꿰뚫는듯한 시선을 비껴내며 대충 수긍한척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격 차이가 너무 큰데? 민호가 머릿속에서 몇번이고 암산해 보아도 손해가 더 컸다. 본부장은 말을 돌리며 관련된 보험계약의 조건들을 들먹였다. 마치…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운송이나 하역작업 중에 큰 사고가 날 것을 예견하는 사람처럼.
그 외의 조항들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검토가 끝나, 조선소와 캐피탈 측 담당자들이 오기 전에 본부장은 자리를 비웠다. 그 틈에 운송계약서를 빠르게 뒤져 ‘목적물’ 조항을 찾아냈다. 그러자 갑자기 머리를 맞은 듯,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
‘운송 목적물 : 선박 블록 1개’
대규모 선박의 건조 작업은 지상에서 하는 건축처럼 한 군데에서 한꺼번에 제작되지 않는다. 자재를 이어붙여 만든 선박의 각 부분, 즉 ‘블록’ 단위로 제작해 도크에서 이것들을 차례차례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조립한다. 그리고 해외에서 운송되는 조선 블록은 아직 내장이 채워지지 않아 속이 빈 상태다. 조선소의 도크에 곧바로 들어가므로 세관을 통과할 일도 없다. 그러니까 가로 세로 각 15미터, 무게 100톤의 커다란 상자와 같은 물건을 아무 제한 없이 중국에서부터 한국 항구로 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이… 미친놈들…”
마치 안개가 걷히듯, 관련된 사건의 아귀가 맞아들어갔다.
먼저, 그들이 블록의 텅 빈 공간에 몰래 채우려는 물건.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마약, 그 중에서 그들이 주로 다뤘던 필로폰의시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십킬로그램만 들여오더라도 사백억을 훌쩍 넘기는 역대 최대 규모가 된다.
이것이 현진조차 정확하게는 모르고 있던 ‘큰 작업’의 실체였다. 그들은 사년 전에 이미 한번 같은 일을 시도했다가, 세진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했을 것이다. 세월에 무뎌지고 방향을 잃었던 복수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책임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세진을 죽이려고 한 게누구였든, 그래서 은폐하려던 일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번에는 빠져나가게 두지 않을 것이다.
다시 내려다본 운송계약서의 출발/도착일자는 아직 공백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
현진이 다시금 재판정에 서는 날이었다.
공판 출석을 위해 목끝까지 채운 흰 셔츠에 검은색 더블코트를 입은 현진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민호의 권유로 검은 물을 들여 짧게 자른 머리때문에 더 그랬다. ‘돈 많은 집 대학생 같다.’ 민호가 옷을 골라주며 한 말엔 웃으며 팔뚝이나 퍽 쳐주긴 했지만.
현진은 휑한 뒷덜미가 어색해 만지작거리다 다시 얌전히 허벅지 위로 손을 얹었다. 아무 생각 없이 법원에 왔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꽤 긴장이 됐다. 본부장과 했던 모종의 합의도, 제가 당장 실형을 살게 된다면야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러면 민호의 일을 뒤에서 살피는 것도 당연히 할수 없게 될 테고.
옆자리에 앉은 민호의 손을 탁상 밑에서 살그머니 잡으면 그가 돌아봐줬다. 작은 손이 잠시간 현진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가, 재판장의 호명에 일어서며 멀어졌다. 먼저 검사가 공소사실을 진술했다. 용어들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다 알아듣기는 힘들었고, 민호가 미리 설명해준 덕분에 제가 특수상해가 아니라 범인도피죄로 기소된 것만 이해할 수 있었다. 장은수 역시 기소되었다고 했다
“…알면서도, 경찰에서 피의자로서 허위로 진술하여 장은수를 도피시켰다는 것입니다.”
‘불기소가 목표였는데, 미안하게 됐다. 그래도 별일 없을거야.’ 현진 입장에서는 애초에 최악의 경우엔 장은수 대신 빵에 들어가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지라 좀 머쓱했다. 기적적으로 의식을 찾은 지점장이 윗선에서 미처 손쓸 새도 없이 병원에 상주하던 경찰에게 범인을 불어 버린 게 현진에겐 호재가 되었다. 관련된 증거들도 명확했다.
등산로 주차장 씨씨티비에 찍힌 장은수 옷 아래로 드러난 길쭉한 물건의 실루엣, 주차장에서 걸어서 출발한 시간과 돌아온 시간, 장은수가 버리고 도주한 차량에서 발견된 혈흔과 범행 도구인 흉기까지. 마치 발견되기만을 기다린듯한 깔끔한 세팅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마 역으로 정의감이 넘치는 초임 검사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현진이 체포된 날 하루동안 묵비권을 행사했던 게 수사기관을 농락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어진 검사의 피고인 신문이 생각보다 더 공격적이었다.
“피고인, 장은수가 성원운수 박현철 이사와 교제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들어본 적이 있기는 합니다.”
유흥업소 마담 출신인데, 고위 간부와 살림을 차린 덕에 어렵지 않게 거래처를 뚫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들리긴 했다. 백주대낮에 회칼로 건장한 남자를 찌를만큼 대담한 여자란 건 아무도 몰랐지만.
“그럼 장은수를 비호하라는 지시를 받고 사건 현장에 간 것인가요?”
“아니오. 전 며칠전까지도 누가 범인인지는 알지도 못했는데요.”
“……”
궤변이긴 하나 사실이기도 했다. 증거가 발견되기 전까지 범인의 정체는 현진의 짐작일 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피고인, 과거 전과에 대해 이야기해 보시죠.”
옆에서 민호가 벌떡 일어섰다.
“재판장님, 본 사건과는 관련없는 내용입니다.”
검사가 맞섰다. ‘피고인의 진술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재판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허락했다.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일단 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조금 당황한 현진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미성년자 때… 소매치기랑, 폭행…입니다.”
“피고인은 열여덟살 무렵부터 소위 ‘가출팸’을 전전하고 폭력조직에 가담했던 전적이 있는데, 초기 수사단계에서 묵비권을 행사한 이유로 ‘피를 보고 당황해서 그랬다’는 둥, 이해하기 어려운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더라도 장은수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범행현장에 나타나 범인으로 행세하고, 진범을 숨겨 체포에 지장을 초래하려는 고의가 있었음이 명백합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고, 더이상 현진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침묵하다 옆의 민호 눈치를 슬쩍 봤는데 그는 뜻밖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 활활 타오르는 의지가 느껴졌다. 아. 이 형 또 불붙었네. 그냥 지금까지처럼 형 뒤에 슬쩍 숨어 버티기로 했다.
곧 변호인의 반대신문 차례였다. 민호가 벌떡 일어나 여유롭게 재판정 한가운데로 걸어나갔다.
“피고인, 경찰 수사중에 본인이 범인이라고 진술한 적 있습니까?”
“아니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를 범인으로 지목하거나, 장은수가 범인이 아니라고 진술했습니까?”
“아니오…”
매끄러운 변론이 이어졌다. 재판장님, 잘 아시다시피 범인도피죄는 작위범입니다. 피고인은 헌법상 보장된 권리로서 묵비권을 행사했을 뿐 아무런 허위진술을 하지 않았습니다. 범인을 적극적으로 고발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범죄가 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니, 오히려 피고인은 장은수가 진범임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죠.
재판부 쪽에 시선을 두다가 다시 현진 쪽으로 돌아선 민호가 질문했다.
“피고인, 미성년자때의 범행 이후에 다시 고발을 당하거나, 경찰 수사를 받은 적 있나요.”
“아뇨… 없었습니다.”
“스무살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이후 성원운수에 입사해 지금까지 근무해 온 거죠.”
“네…”
“재판장님. 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만… 참고를 위하여 말씀드리자면, 피고인의 과거 잘못된 행적은 미성년자때 생계를 위해 들어간 곳에서 강압적 지시를 받은 결과였습니다.”
소년범에 대한 처분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교화라는 점에 초점을 두면, 피고인이 문제없이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는 건 우리 사법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고 보아야겠죠. 어쨌든 이 사건에서 구성요건상 범인도피죄가 성립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데, 굳이 피고인을 공동으로 기소한 것은…
“압박을 통해 진범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의도로 억지 기소를 한 것이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
법원 복도로 나온 현진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나온 기분이었다. 검사 표정이 어찌나 살벌하던지.
“형… 그렇게까지 해도 돼?”
“말했지. 애초에 무리한 기소라고. 이런 사건에서 부드럽게 나가면 오히려 뭔가 켕기는 게 있단 심증을 줄 가능성도 있어. 감정이 들어간 게 아니라, 역할극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면서도 한편 머쓱하게 옆머리를 만졌다. 뭐…그래. 평소보다 감정이 좀 들어가긴 했다. 그쪽에서 먼저 긁으니까 그랬지.
“그치만 나도… 떳떳한 건 아니잖아.”
민호와 재회하기 전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자꾸 작아지고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별 생각없이 누덕누덕 기워놓듯 살아온 지난 사년 때문에. 검사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 범인이 따로 있다고 말만 안했을 뿐이지, 칼에 찔린 사람 옆에 가만히 서있었던 건 맞으니까. 이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앞으론 아마 무슨 이유로든 떳떳하게 살기는 힘들 테니까.
“야 황현진, 형 봐.”
또, 그런 꼰대같은 말투.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도 현진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진짜 말이 안되는 변론이었다면 나도 안 했어. 다만 네가 한 잘못이, 사람 하나 칼로 찔러놓고 도망간 사람 제쳐놓고 감옥갈 이유가 되진 않는다는 거야.”
“그치만… 진짜 내가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해? 난… 그냥…”
“현진아. 변호사는 판사도 검사도 아니야. 무슨 대단한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고.”
변호사는, 네 편들어주는 사람이야.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뢰인의 뜻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사람일 뿐이라고. 이민호는 그런 소리를 눈도 깜짝하지 않고 했다. 따뜻함이라곤 한톨도 없는 냉정한 말인데 이게 뭐라고 위로가 되는지. 그게 꼭, 제가 무슨 짓을 해도 편을 들어 주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물론 민호에게 그런 짐을 얹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법원 후문으로 나서면 어느새 다가온 봄기운에 공기가 훈훈했다. 현진은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형. 나… 회사 그만둘까.”
곧바로 농담이었다고, 무시하라고 얼버무렸지만 민호는 쉽게도 대답했다. 그러든가.
“혹시 또 무슨 이상한 일 시키면 바로 그만둬. 내가 너 하나 못 먹여살리겠냐? 집에서 살림 해라. 집안일 귀찮아 죽겠어.”
“참 나. 농담이라구요, 아저씨.”
“뭐. 그럼 나도 농담한 걸로 쳐.”
주부 황현진, 생각해보니까 웃기네. 민호가 피식피식 웃었다. 나 데려가서 살림이나 시키려고 그랬어? 엉 좀 어울리지 않냐? 그런 실없는 소리나 주고받으면서, 법원 앞마당을 걸어나가는 동안 현진은 괜히 민호 어깨나 토닥거려 봤다. 제가 한 선택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뭐, 애초에 형같은 사람이랑 내가 어울리기나 한가. 애초에 해피엔딩을 기대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못 버린 한톨 미련이 현진의 발목을 무겁게 했다. 자꾸 돌아보게 됐다.
M. Mine
새벽에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이상하게 그런 전화는 벨소리부터 다르게 들린다.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해진 민호에게 현진이 옷을 챙겨주고 차키를 달라고 했다.
“형, 이 상태론 운전 못해. 내가 할게.”
“그래…”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현진이 핏기없는 민호의 얼굴을 이따금씩 룸미러로 살필 뿐이었다. 20분뒤 도착한 병원에서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사망선고는 이미 내려진 지 오래였다.
침상 앞에 다다른 민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세진을 살피느라 뒤에 있는 현진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때, 현진은 발치에 붙은 환자 인적사항을 보고 얼어붙은 듯 멈춰서 있었다.
[성명 : 최 세 진]
[성별 : m, 입원일자 : 2023. 1. 10.]
최세진.
침상에 누워있는 얼굴까지 본 순간, 기억은 순식간에 몇년 전 어두운 항구로 돌아간다. 현진에게서 창고 키를 받아들던 얼굴 하얀 청년. 발 아래가 아득해져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뒤늦게 찾아봤던 지역뉴스가 아직도 생생했다.
- 지난 5일 새벽 거제시 S조선소 도크에서 협력업체 직원 최모씨가 물에 빠져 현재 중태입니다. 조선소 측 관계자는 “입항 예정이었던 바지선 때문에 도크에 물을 채워둔 것이며 당일 해당 업체에 배당된 야간 작업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현재 정확한 사고원인을 조사 중입니다...
현진도 그가 물에 빠진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몰랐다. 다만, 현진 대신 급하게 동원되었던 일반인이 다름아닌 그라면…
그렇다면… 나는 형에게서…
현진은 저도 모르게 돌아서 병실에서 나왔다. 얼빠진 채 몇걸음을 걷다가, 바깥을 향해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
“어이 황현진이. 대가리 꼴이 갑자기 바뀌었다잉? 맨날 무슨 테레비 나오는 아들처럼 댕기드만.”
“… 안녕하셨습니까, 형님.”
이틀 뒤, 영도 봉래동 인근의 폐공장.
현진이 새로 배정된 작업장의 행동대장 병천은 예전부터 현진에게 핀잔 주는게 일이었다. 곱상한 놈이 빌빌대기만 한다는 둥, 주로 외모에 관한 지적이었다. 다혈질로 유명했던 성격은 나이를 먹으니 좀 유해졌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작업장은 조선소와의 접근성만을 보고 고른 것인지, 폐공장을 사들인 것이라고는 해도 개조는 커녕 조명조차 제대로 달아두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긴 작업대에 설치된 몇개의 스탠드조명이 다였다. 곧 ‘큰 물건’이 내려오면 이곳에서 소분하여 전국으로 배송될 것이다.
“니 그, 변호사 뒷조사하는 일은 끝났나?”
“네… 별거 없던데요.”
“맞제? 뭐 책상에 앉아가 공부만 한 놈들이 건달들 하는 일에 무슨 관심이 있을라고. 큰형님 성격은 병이다 병. 내가 그쪽은 신경안 써도 된다 했는데도.”
사람이 다, 자기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 이거야. 니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된다. 요즘 계속 회사 쪽 일만 했제? 공사판일이 무슨 재미가 있나. 건달로 들어왔으면 건달 일을 해야지. 병천은 싱글벙글 웃으며 공장 안쪽 사무실로 현진을 데려갔다. 비치된 가구는 아마 공장 폐업 당시부터 있었을 낡은 가죽소파 한세트와 테이블이 다였다. 현장 막내가 종이컵에 타온 커피믹스에서 올라오는 김이 선명했다. 병천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중국 갈 준비는 다 됐고?”
현진은 ‘물건’이 내려오는대로, 물건을 실어온 배편을 그대로 타고 중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가 현진을 반기는 이유는 사실 이것이었다. 현진이 아니었다면 중국에 나가야 할 사람은 그였을 테니까.
“예. 딱히 정리할 것도 없어요.”
“그렇제. 내도 그렇지만 이 일 하면 가족 없는게 차라리 편하다. 에이 그래도 니는 젊은 놈이, 연락하는 아가씨도 하나 없드나? 무슨 재미로 사노 니는?”
“돈 모아서 말년엔 편하게 살아야죠.”
하여튼 웃기는 새끼라며, 병천이 껄껄대며 웃었다. 현진은 떠나기 전까지 작업장 일을 돕기로 했기에 일에 관련된 몇가지 지시를 받고, 접선일에 대한 정보도 듣게 되었다.
“2월 14일 새벽 4시라 카더라.”
“…얼마 안 남았네요.”
“그래 마, 준비는 내가 다 해놨어. 니는 물건 받을때나 쪼매 도와주지, 뭐 할것도 없다니까?”
“형님,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사년 전에 거제에서는… 왜 일이 어그러졌던 겁니까? 현진의 물음에 병천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일만 아니었어도 내가 그때 한몫 크게 잡아 은퇴했을 거라는 말을 하면서.
어수선한 시기에 큰 물건 처리해보려고 하다 그랬던 거지. 말이 되나? 아무리 일손 부족했어도 육지에 물건 받을 애들을 깔아놨어야지, 뭔 하청업체 직원을… 일반인을 꼬셔놨다길래 처음부터 불안하다 싶었다. 니랑도 얼굴은 한번 봤다며? 하여튼 일이 꼬이자니 끝이 없었던 게, 그때 운반을 하필 칼치형님이 했다 아이가. 그양반 성격이 오죽 지랄같아야지.
도크 열어주기로 한 아새끼랑 현장에서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던데.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일반인을 식물인간 만들고…쯧. 본인은 밀수선 돌려서 그대로 중국으로 튀어서 겨우 수습했지. 이번 배 띄우는 날에도 또 실패하면 손목 정도로는 갚지도 못할기다. 큰형님이 몇년을 벼른 일인데...
“그렇겠네요… 용서받을 수가 없겠네요.”
뒷 얘기는 대충 흘려넘긴 현진은, 고개를 젖혀 한숨을 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아니길 바랬는데. 이젠 정말 끝이라는 자각이 더디게 따라왔다. 현진은 그날 병원을 떠난 이후 민호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마주볼 염치란 게 없어서였다.
-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빈소는 내내 한산했다.
세진의 옛 동료들이 한꺼번에 다녀간 게 사실상 조문객의 전부였다. 손님이 없다고는 해도, 유가족으로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 발인을 고작 몇시간 앞둔 새벽이 되어서야 민호 혼자서 소주 한잔 기울일 짬이 났다.
종교가 없으니 어디에 빌어야 할 지 모르겠지만. 그저 이제는 평안하길. 마음 속으로 동생에게 올린 술은 다시 민호의 입으로 들어갔다. 새삼스레 이별이란 느낌이 들지는 않아서일까. 임종을 알리는 전화를 받은 이후로 지금까지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세진이 중태에 빠진 날부터 지금까지 서서히 꺼져온 희망은 종내엔 작은불씨조차 남지 않게 됐다.
이 공허함의 원인에 또 한사람의 부재가 일조하고 있다는 걸 민호도 알고 있었다. 며칠째 현진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돌려받는 건가…”
이유도 모른 채 혼자 남겨진 기분을 안다고, 얼마전 그에게 떠들어댔던 게 떠올라 민망했다. 처절하도록 외로운 순간에 그가 없어진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기분을 알 것 같은데. 그간 잘난 어른인 척 했지만 의외로 더 의지했던 쪽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은 마치 텅빈 껍데기같다고 느꼈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 어디를 보고 살아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빈소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창빈이 주섬주섬 신발을 벗고 있었다.
“여. 혼자네?”
“넌… 어제 와놓고 뭘 오늘 또 와.”
“야근하고 가는 길에 들렀다. 뭐, 할 얘기도 있고 겸사겸사.”
어디선가 소주잔을 찾아낸 창빈이 민호의 옆자리에 붙어 앉았다. 안주도 없이 쓴 술부터 목으로 넘긴 그가 민호의 어깨를 두들겼다. ‘괜찮나? 울고 싶으면 차라리 울어라. 그러다 병난다 형.’ 그 말에 왜 현진의 어깨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어깨가 아니라면 앞으로 영영 울지 못할 것도 같다. 민호는 그저 고개를 젓고, 술을 따랐다. 마른 안주를 만지작거리던 창빈이 입을 열었다.
“형. 그때 넘겨줬던 선박 정보 있다 아이가, 방금 운송일정 떴다.”
“……”
“걔네 조선블록 생산공장이 중국 산동성이랑 저장성에 있더라고. 대충 나올만한 항구는 특정했는데 일정 정보가 없어서 애먹고 있었거든. 근데 첩보가 들어와가지고. 대조해 보니까 맞더라.”
민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끝난 게 아니었지. 세진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잡히지 않은 한, 끝이 아니다. 수면부족으로 멍한 정신을 다잡아 머릿속에서 조각난 정보들을 이어붙여 본다. 자신에게 계약서 검토를 맡겼던 선박정보와 출항일정의 일치, 하필 이 시기에 사라진 현진…
그런데, 이게 다 우연일 수 있나?
“서창빈, 내가 그간 제보한 걸로 공적 많이 쌓았지.”
“…와이라노, 또. 무섭게.”
“마지막으로 니 정보원 한번 제대로 써먹을 생각 없냐.”
역대 최대 규모 필로폰 밀수 사건, 네가 잡게 해 줄게.
N. Needless to say
2월 14일 새벽 3시. 부산시 영도구 모처의 한 조선소.
부둣가에 세워진 소형 예인선은 곧 출항을 앞두고 있었다. 조직원 두명과 함께 예인선에 탄 현진은 준비에 한창인 선원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잠시 갑판으로 나왔다. 한시간 쯤 후에 이 예인선은 중국에서 출발한 예인선과 영도 앞바다에서 만나 그들이 끌어온 바지선을 이 조선소의 도크까지 운반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배에는 자신이 없을 것이었다.
현진은 조명이 없어 그저 검기만 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바람이 많이 불어 파도 소리가 요란했다. 이런 날이면 마린시티에 있는 민호의 집에선 창문을 닫아도 파도 소리가 들렸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한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경찰이 뜬금없는 익명 제보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 지가 관건일 텐데, 과연 오늘 조직에서 준비한 일이 어느 단계에서 저지될 것인지 궁금했다. 아마도 필로폰을 실은 바지선을 압수하기 위해 조선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 자신이라면 아마도 이 예인선에 잠복했겠지만, 바다 위에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위험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려 할 거라고…
음?
갑판에 쌓여있는 짐더미 구석에서 작게 부스럭대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야, 황현진.”
지금 여기에서 가장 현실성 없는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이민호? 진짜 이민호인가?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황현진. 말 안 들려? 너, 여기 있으면 안돼.”
“미쳤어? 진짜 형이야?”
“진짜지 그럼. 지금 조선소에 경찰 쫙 깔렸다고. 씨, 배 타기 전에 빼내려고 했는데, 뭘 그렇게 딱 붙어 다니냐? 그 조무래기들이랑.”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그럼, 서창빈한테 준 정보가 나한텐 안 올거라고 생각했냐.”
너잖아, 그 익명의 제보자.
현진이 입을 다물자 민호가 다가와 팔을 잡았다.
“미친놈아, 제보를 했으면 너도 떠야지 넌 왜 여기…”
“쉿!”
갑판으로 오르는 발소리를 들은 현진이 급히 민호를 짐더미 옆에 밀어넣었다.
“행님… 여기 계십니까?”
“어, 성진아. 왜.”
“방금 시동 걸었습니다. 위험하니까 내려오시랍니다.”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조직원을 따라 사라졌던 현진은 몇분 뒤 돌아와 민호 옆에 쭈그려앉았다. 배는 그새 멈춰 닻을 내렸고, 갑판의 후미 쪽에서 중국에서 도착한 바지선을 체결하려는 듯 몇번의 충격음이 들렸다. 항구와의 거리는 꽤 멀어 보였다. 현진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일단 여기선 어차피 못 내리니까… 항구 돌아갈때까지 여기 잘 숨어있어.
“그러니까 무슨 생각으로 여길 와. 나중에 혼자서 어떻게 빠져나가려고.”
“혼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제 곧 조선소로 돌아갈 거니까… 여기 잘 숨어있다가… 이따가는… 안벽에 배 정박하기 전에 뛰어내려.”
“난 너 안 데리고 갈 생각 없다니까.”
그 순간, 뒤에서 ‘철컥’하는 장전음이 들렸다.
현진이 더욱 놀란 건 민호도 순식간에 품에서 권총을 꺼내 상대를 겨눴다는 것이었다. 짐더미 너머로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현진이 낭패감을 숨기질 못했다.
“…칼치…”
“어이. 황현진이. 오랜만이다.”
‘칼치’라는 별명이 왜 생겼는지 설명 없이도 알 것 같았다. 왼쪽 뺨과 목덜미의 흉터가 선명했다. 구둣발 소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겨누어진 권총의 광택이 번들거렸다.
“이야, 큰형님이 하도 유난을 떨길래, 노인네 드디어 노망났다 했더니. 그양반 말이 진짜였네. 씨발. 십년만에 한국땅 밟자마자 두눈뜨고 뒤통수 처맞을 뻔 했다야.”
“…잘 지내셨습니까 형님.”
현진이 천천히 민호의 앞을 가리며 그의 팔을 내리려 했지만 민호는 총을 겨눈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민호도 그를 알고 있었다. 사년 전 세진과 독대했다는 그 인물.
“덕분에 못 지냈지. 옆에 계신 분은 소개를 안 해주네. 내가 맞춰볼까. 그 변호사 양반 아냐.”
너랑 죽고 못사는 사이라더니, 혼자 여기까지 따라올 정도면 존나게 각별한갑다? 이죽거리는 말에 동요하지는 않았다. 민호가 차가운 표정으로 응수했다.
“그래. 니가 죽인 최세진의 형이기도 하고.”
“그래서요, 변호사님. 그 쬐깐한 거, 설마 진짜 총이라고 우기게? 딱 보니 리볼버식 가스총이구만.”
“쏴 보면 알겠지. 당신 말이 맞는지. 아닌지.”
등에 갑판 난간이 닿았다. 더 뒷걸음칠 곳은 없었다.
“자수해.”
“뭐라고?”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최세진에 대한 살인. 그리고 마약 밀수는, 이번 것 포함해 최소 두건.”
“글쎄 내가 대가리가 나빠 그런가, 모르겠는데. 그 누구야, 최세진이는 자살이었고,”
이때 현진은 다급히 민호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는 여전히 고요했다.
“마약 밀수? 그것도… 잘 모르겠는데?”
칼치는 빙글대며 천천히 다가왔다. 이정도면 권총의 사정거리가 되고도 남았다.
어떡하냐? 변호사님, 저 쥐새끼가 흘린 정보만 믿고 여기까지 왔겠지만 다 헛짓거리야. 니들 오늘 여기서 흔적도 없이 개죽음이고, 이 배 다 털어봐야 아무것도 없을 거거든. 흰 가루 한톨도 안 나올 거야.
“황현진아, 너는 씨발 존나 비싼 미끼였다고.”
“일부러 저한테… 잘못된 정보를 준 거라고요?”
이번엔 현진이 한발짝 내딛으려는 걸 민호가 붙잡았다. 진정해 이 새끼야.
“그러니까 니들이 들여온 필로폰은 여기 없다, 이 말이지? 칼치, 아니… 한국 이름으론 박형석씨.”
“뭐 깡패 새끼들이라고 대가리도 없는 줄 아나. 그 비싼 물건을 뭘 믿고 저새끼한테 맡기겠어? 아주 존나게 안전한 곳으로 가있지.”
사색이 된 현진이 민호를 돌아봤는데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이쯤 되어서부터는 현진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형은…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거지? 민호가 손목시계를 한번 보더니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아, 거제 T조선소에 가있는 그 배 말이지?”
“뭐?”
“머리를 좀 쓰긴 했던데. 같은 날 같은 항구에서 출발하는 다른 배를 몰래 한대 더 빌렸더라구. 그쪽은 아마 지금쯤이면… 일망타진 하고도 남았겠네. 거제 세관이랑 검찰에서 합동 작전을 짰다던데.”
보란듯이 선박 계약서를 보여주면 여기에만 달려들 줄 알았나본데… 니들이야말로 짭새들한테 대가리가 없는줄 안 거 아냐? 뭐, 두대 중에 어디에 물건을 실었을지 고민하긴 했지.
“근데 내가 어떻게 알았을 것 같아? 여기가 눈속임이고 거제 쪽이 진짜라는 걸.”
“……”
“당신을 이쪽에 태웠다잖아. 그럼 간단하지. 이미 한번 실패한 놈을 어떻게 믿고 그 비싼 물건을 맡기냐?
미끼는 너지, 이 씨발 새끼야.”
칼치가 달려들려고 하는 순간, 바다 쪽에서 조명이 확 터졌다. 소리없이 다가온 해경 추격선이었다. 사이렌이 귀를 울리고, 확성기로 배를 멈추라는 정선명령이 떨어졌다. 칼치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포기하고 자수해. 배는 비었다며. 잘 하면 밀입국으로 퉁칠 수 도 있겠네.”
“지랄하네. 내 이름 불렀을 때부터 녹음한 거 모를 줄 알아?”
고무가 둘러진 추격선의 가장자리가 퉁, 하고 배에 닿고 후미에서부터 해경이 승선하는 소리가 들렸다. 총을 든 다른 조직원들과 대치하는 걸 보면서 현진은 초조해졌다. 칼치 성격에 대해 이미 들은 바가 많아서다. 아닌 게 아니라 손을 심하게 떠는 칼치는 이미 눈이 맛이 갔다. 현진은 급히 민호에게 속삭였다. 형. 그냥 내가 신호하면 뒤로 뛰어. 저 새끼 순순히 포기할리가…
“근데 변호사님. 이러니까 댁이 다 이긴 것 같지?”
형, 빨리. 저새끼 말 듣지 말고…
“최세진이. 왜 죽었는지 궁금하진 않고?”
“근데, 이 새끼가 어디서…”
“형, 듣지 말라니까.”
현진이 다급히 민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칼치의 뒤쪽에서 접근해오는 해경 대원들은 다른 조직원들과 대치하느라 쉽게 이쪽까지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양쪽 다 실탄이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좁은 배 위에서 어느 한쪽이 터뜨리기 시작했다가는 몰살할 수도 있었다.
“댁 때문이잖아, 그거.”
“뭐?”
“그럼 뭐겠어. 직장 잘 다니는 어린애를 설마 돈으로 꼬셨을까? 서울에서 공부하는 형 있지 않냐… 그 얘기만 했는데 뭐, 표정 볼만하던데. 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그때 현진의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제게서 열쇠를 받아들던 세진의 힘없는 목소리. ‘안 한다는 선택지가 있으셨나보네요.’ 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결국… 내가…
“그러니까 그게 댁 때문이지 뭐겠어.”
“이 새끼가…”
순간 민호의 손에서 방아쇠가 당겨졌다. 총성이 울리는 순간, 현진은 민호의 목덜미를 감고 넘어뜨려 이를 악물고 난간을 넘었다.
첨벙.
두 사람이 바다에 빠지는 소리는, 그 한발을 시작으로 배 위에서 일어난 총격전의 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다.
O. OPEN ENDING
컥…
민호는 눈을 뜨자마자 입안으로 들어온 짠물을 뱉어냈다. 사위는 여전히 칠흑같이 깜깜했다.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 무겁고 차가운 물의 부피. 온 몸에 감각이 없는 와중에 누군가가 제 목덜미를 감고 헤엄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현진…아…”
“깼어? 형, 말 많이, 하지 말고. 몸에 힘 빼. 지금처럼 그냥 떠 있으면 돼. 알겠지.”
입수할때의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나보다. 배 위에서 일어나는 아수라장의 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아직도 끄지 않은 사이렌 소리가 어지러웠다. 총격전을 피해 배 뒤편으로 피신한 모양이었다.
얼마동안이나 의식을 잃었었는지 모르겠지만, 밤에는 바람의 영향으로 헤엄치지 않으면 계속 육지에서 먼 곳으로 밀려나간다. 아직 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걸 보면 그새 현진이 애를 쓴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파도가 높아 제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민호가 제대로 수영을 할 줄 모른다는 거였다. 고작 그의 도움을 받아 떠 있는게 최선이었다.
추가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할 텐데 겨울 바다에서 얼마나 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공포심이 들기 시작했다. 몸이 굳고 추위에 입술이 떨렸다. 힘이 들어가니 자꾸 가라앉으려는 몸을 현진이 억지로 끌어올렸다.
“형, 나 믿지.”
“왜. 뭔데… 그러지마, 무섭게.”
“추격선까지만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머네. 그래도 아마 이제 해 뜨면, 발견되기 쉬울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지금처럼 있어 알겠지…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는데 제 목을 감은 팔 근처가 이상하게 미지근하다는 걸 알아챘다. 바닷물의 차가움과는 달랐다. 혀끝의 짠맛과 더불어 무언가 쇠맛 같은 게 느껴진다는 것도.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현진의 어깨에 난 총상을 봤다.
“야…”
안돼. 안돼… 너까지.
“형, 아니야, 아직 괜찮아. 나 예전에도 맞은 적 있어. 본 적 있지. 봐바, 해 뜨잖아 이제…”
현진은 오히려 패닉이 온 민호를 안심시키느라 애썼다. 아닌게 아니라 현진의 몸에 남은 무수한 흉터 중에는 총상으로 인한 것도있었다. 왼쪽 옆구리. 어두운 밤이면 그걸 하염없이 쓰다듬었었는데.
그의 말대로 어둠이 걷히고 사위가 어스름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울컥거리며 흘러나오는 핏물이 이제 눈으로도 보였다. 그러나 추격선도, 육지도 아직 너무 멀리에 있었다.
“현진아. 황현진.”
우리 힘 빼고 그냥 떠 있자. 어차피, 곧 발견될거야. 내가… 미리… 다 말해두고 왔거든? 그러니까 찾으러 올 거야. 너랑 나.
응, 형. 온순한 대답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민호의 말대로 위치를 바꿔 배영하는 자세로 눕긴 했다. 팔짱을 껴 서로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짠물을 뱉느라 숨쉬기가 버거웠다.
“형, 눈 감으면 안돼.”
“너나 잘해.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핀잔을 들으니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조금 웃음이 났다. 현진은 그동안 망설였던 말을 지금 하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다시는 말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일출이 시작되자 빛 때문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형 동생… 최세진…”
“……”
“그 사람, 죽게 만든 거… 나야.”
아까 다 들었지. 근데 그거, 내가 떠넘긴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난… 형이랑 평범하게 살고 싶었거든. 그래서… 모른척 했어. 내가 살겠다고…
“……”
“미안해.”
그러나 민호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팔짱을 낀 손에 꽉 힘을 줬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형…”
“내가 여기까지… 그거 모르고, 온 것 같냐.”
현진의 태도에 불쑥 화가 치밀었다. 내가 널 조지고 싶었으면 신고나 하고 기다렸지, 미쳤다고 겨우 가스총 한자루 들고 여기까지 왔겠냐고. 서창빈이 말리려고 유치장에 가두려고 하는 거 겨우 뿌리치고 왔는데. 권총이 겨누어진 순간 죽음까지 각오했는데, 이 자식은 무슨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마냥 무게를 잡고 있다. 개소리야. 그런 식으로 허망하게 사람을 잃는 건 한번으로 족하다.
“새끼야 잘 들어, 여기서 죽으면 진짜 죽여버린다…”
그 말에 현진의 긴장이 풀려 피식 웃었다. 뭔, 그게 무슨 말이야… 형은 진짜 이상해…
“미안하면 갚어. 내가 됐다고 할때까지. 용서 안 해줄테니까, 계속 갚으라고. 알겠어?”
대답해. 대답해… 황현진.
어느새 완전히 동이 텄는데, 현진은 한번 눈을 감더니 다시 뜨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아무리 팔을 꽉 붙들어도 자꾸 팔짱이 풀렸다. 추위에 덜덜 떨던 민호 역시 조금씩 의식이 멀어졌다.
멀리서 고무보트의 엔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P. Prologue
오후 두시의 부산대학교 병원.
1층 로비에서 환자복을 입은 노인들이 티비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얼마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마약 밀수 사건의 후속보도였다.
- 얼마전 거제시 모 조선소에 입항한 선박에서 수백억원어치의 필로폰이 거제세관과 검찰청의 합동조사반에 의해 적발되었습니다.
현장에서 검거된 밀수자들 이외에도 연계조직과 비호세력이 있었을 것으로 우려되었는데요, 현장에서 실종된 인원들을 포함해강도높은 수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검거 과정에서 오랫동안 경찰 정보원으로 활동해온 현직 변호사의 공적이 밝혀지며 화제가 되었는데요…
티비를 보며 수군거리는 노인들의 뒤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성큼성큼 지나갔다. 번쩍이는 구두코와 각잡힌 트렌치코트가 왠지 병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VIP병동 입구에 보호자출입증을 찍고, 제일 안쪽 병실 앞으로 가면 의자에 앉아있던 경찰이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아이고, 변호사님. 오늘도 오셨네요.”
“예. 수고 많으십니다.”
그가 지나쳐온 간호사실 티비에도 계속하여 같은 뉴스 화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인터뷰 영상이었다. ‘이번 일로 한국도 더이상은 마약 청정국이 아니다, 조선소로 들어오는 물류를 전수조사해야된다는 등 여러 의견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앳된 얼굴의 변호사가 앵커와 마주보고 있었다. 자막이 잠시 드러났다 사라졌다. [변호사 이민호(변시 10)]
- 글쎄요, 진행중인 형사사건과 관련된 것이라 제가 말씀드리기는 부적절한 것 같고. 다만 검거 과정에서 거제 조선소 근로자들의 제보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폭력조직의 개입 문제나, 갑작스럽게 조선블록 입항 일정이 생긴 점 등 수상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알려주셔서 현장을 급습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개개인의 신고 덕분이었다는 거군요. 그럼 동일한 사건들이 이미 빈번했을 거라는 추측들은 사실이 아닌겁니까?’
- 아직 수사가 진행중이긴 합니다만, 이번 일로 조선소가 불법적 밀수의 거점이 되었다, 이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병실 문을 지키던 경찰에게서 형식적인 몸수색을 마친 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후 햇살에 눈이 부셨다.
드르륵, 문을 닫으면 시끄러운 바깥 소리가 차단되어 조용히 가습기 돌아가는 소음만 방을 채웠다.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두고 침대로 다가서면 인공호흡기를 쓴 하얀 얼굴이 잠들어 있었다.
흰 시트 아래로 늘어진 손에는 침대와 연결된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민호가 조심스레 그 손을 쥐어 보았다. 계속 주입되는 수액 때문인지 차가웠고, 양손으로 꼭꼭 주물러 봐도 체온이 전달되는 것 같지 않다.
“나 병원 지긋지긋해 하는 거 알면서, 이 새끼야.”
현진은 일주일째 의식이 없었다. 또다시 의식이 없는 사람을 지켜봐야 한다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좋지 않은 결과를 본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더더욱. 의사의 말로는 타고난 근질이 좋아 상처도 순조롭게 회복하고 있고, 모든 지표들도 정상적이어서 벌써 깨어나고도 남을 상태라고 하는데 왜 이런 건지.
얌마, 니가 안 일어나서 여태껏 내가 사 온 비싼 과일 경찰아저씨가 다 먹었잖아… 이제 일어나라 좀.
양손으로 꼭 붙잡고 있는 자세는 마치 기도하는 사람 같았다. 물끄러미 바이탈 화면을 보면서 무언가 변화가 있기를 바라고 있을때. 잘못 본건가? 파동의 모양이 변한 것 같았다. 민호가 황급히 일어나 간호사를 부르려 할때 손 안에서 확실히 움찔,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야…”
반쯤 눈을 뜬 현진이 손을 꿈지럭거렸다. 형…? 목이 다 잠겨 속삭임에 가까웠으나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너스콜 버튼을 누르자 간호사가 달려와 각종 수치를 재고 의사를 부르느라 주변이 분주했다. 마주친 두쌍의 눈만 고요했다.
“왜 이렇게 오래 잤어.”
“나… 얼마나 잤어…?”
“일주일 넘게, 임마.”
“또 걱정했겠네 형…”
“알긴 아네.”
딸기 냄새 난다. 딸기 사왔어?
현진의 말에 눈이 빨개졌던 민호가 그제서야 피식 웃었다. 네가 진짜 개코긴 하다. 니가 좋아하는 딸기 이제 끝물인데, 안 잤으면 많이 먹었을 거 아냐. 그러자 현진도 웃으며 그러게… 대답하다 팔의 움직임이 수갑에 저지당하는 걸 느꼈다. 침대 기둥에서 찰그락 소리가 났다.
“나 드디어 잡혀가나…”
“그래. 너 눈 뜨면 잡아넣으려고 다들 눈에 불 키고 있었지.”
“오. 진심 무서운데.”
민호가 천천히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뭐가 무서워, 혼자 중국 가겠다고 배 탈땐 안 무서웠냐? 니 잡아가라고 경찰서에서 말 안하고 버팅길 땐 안 무서웠고?
“그러게… 그땐 무서운 거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이 더 당당해야지. 부산에서 제일 비싼 변호사 쓸 건데.”
“또 형이 해 주게?”
“그럼 누가 해.”
우와. 나 돈 하나도 없는데 큰일났네. 현진의 너스레를 툭 받아쳤다.
“앞으로 천천히 갚어.”
말했지, 내가 됐다고 할때까지 갚으면 되잖아. 중얼거리는 민호의 말에 현진이 멋쩍게 웃었다. 뭔가 엄청난 프로포즈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다.
“알았어. 이자 엄청 쳐서 받아. 알겠지.”
수갑 찬 손을 꽉 쥔 악력에 지지 않도록, 다부지게 손을 고쳐 잡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