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 워닝: 죽음, 교통사고
그러게, 인생 착하게 살았어야지.
여기서 인생이란 무엇이냐. 초록사이트 국어사전 기준 일 번,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 이 번, 어떤 사람과 그의 삶 모두를 낮잡아 이르는 말. 삼 번, 사람이 살아있는 기간. 다리 밑에서든 뱃속을 가르고 나오든 우렁차게 울음 터트리는 순간부터 야트막한 신음소리 껙, 을 마지막으로 숨 멎어버리는 순간까지. 누구에게는 찰나이기도 하고 또 누구에겐 이십만 년처럼 지리멸렬하게 긴 시간이기도 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그게 인생을 빗대어 하는 말이라면 백 퍼센트, 아니 이백 퍼센트 틀렸다. 사람은 죽을 때 가장 초라하고 별볼일 없으니까.
미안한데 아저씨요, 이제 가실 시간이거든요. 예?
남자는 말라붙은 입술로 뭐라 달싹거리지도 못했다. 고개를 젓는 모습이 딱하기 그지없었다. 이승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찾아갈 사람도 없어 죽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 영을 이대로 두면 땅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지박령이 되어버리고야 말 것이다.
민호가 흰색 완장을 찬 왼팔을 드니 죽은 남자가 곧잘 돌보았던 검은 짐승 하나가 주변을 휘이 돌았다. 고양인 줄 알았더니, 그보단 작고. 눈짓으로 알은 체를 하자 드러내는 이가 날카롭다. 차라리 냐앙, 하고 우는 소리면 어여삐 여길 것을.
연고도 없이 변두리의 삶을 영위하던 58세 박모씨. 땅으로 돌아가기엔 젊은 나이었으나 여기서 생을 마감하다. 2월 13일 오전 5시 14분. 이 남자는 병사도 아닌 고독사였으므로 그의 죽음을 목도할 이들은 없다. 민호는 곧 의사처럼 진짜 사망선고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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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진 이민호
차사 민호의 팔자라는 건 세워봐도 눕혀봐도 진짜 박복했다.
이승에선 장수 끝에 철밥통 자랑하는 9급 공무원 그거 됐다고,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키우던 고양이 셋에 민호까지 대가족이 얼싸안고 울던 게 엊그제였다. 아홉 시 되기 십오 분 전부터 문앞에서 기다리시는 단골 민원인들 전방에서 대하는 동사무소 직원의 삶이란 예상보다 피곤했다. 그래도 영 싸가지없게 자라진 않아서, 적당히 비위도 맞추고 남의 아들이 안 하는 효도도 가끔 해가매 꽃웃음 장착하고 열심히 살다 젊은 나이에... 객사했다.
죽은 게 억울하냐고 물으면 글쎄. 마음에 걸리는 이들 없지 않았으나 구천을 떠도는 영이 될 만큼 원한이 깊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승에선 일신 편할 줄 알았다. 남들 믿는 기독교식으로 지옥은 절대 아니고 천국 가기 전 단계가 있다면 커트라인쯤 훌쩍 넘을 거라 생각했다. 민호는 좋은 짓을 많이 한 건 아니었지만 나쁜 짓을 잘 안 했으니까.
그런데 곱디고운 민호 얼굴 보던 염라가 하는 말이. 해서, 너는 여기서도 공무를 볼 놈이다. 민호가 해온 작고 큰 선행 내역들을 사장이 가게 영수증 챙기듯 꼼꼼히 읊은 뒤 내린 결론이랬다. 아니, 죽었는데 뭔 팔자가 있대요? 억울해서 소리친 건 덤이고.
저승에서도 생이 있고 사주팔자가 있으며 직급과 직책이... 듣다가 차라리 꿈인가 싶었던 민호는 지랄, 야, 니가 뭐하는 새낀데, 하며 달려들었다. 일렬로 보좌하던 놈들이 구라뻥은 아니었는지 민호의 양팔을 붙잡고 끌어냈지만.
표정도 없는 정장남들은 뒤로 흐르는 흙탕물에 민호를 밀어넣었다. 그 흙탕은 개울인 줄 알았으나 빠지고 나니 깊이 모를 강이었다. 강의 밑바닥에는 민호의 발목을 붙드는 사념들로 가득했다. 아래로, 더 아래로. 이승에서 갓 넘어온 신출내기 영혼을 곧 잡아먹고야 말겠다는 듯 끌어당기는 힘에 버티기란 불가능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뭐든.
어디에든 빌었다. 이미 한 번 죽은 몸인데 두 번 죽는 게 무서웠다. 인세에서 민호를 덮쳐버린 음주운전 차량보다도 훨씬. 마빡이 깨져 피가 흐르고 다리가 꺾인 제 몸을 보는 것보다, 저 멀리 날아간 케이크 박스를 기다렸을 민호의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보다. 무서웠다.
곧 옥좌에 앉아계시던 염라가 생쥐꼴로 젖은 민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할래, 안 할래.
저승의 강물은 매운맛이 났다. 그 매운맛을 보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민호를 보고 염라며 그 뒤에 있던 따까리들이며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저 새끼 저거, 저승에서 승질 드러운 놈들 줄세우면 앞단에서 얼굴 내민다고.
차사급인 민호는 꼭 하루를 받았다.
말인 즉슨 누군가의 죽음을 인도하는데 주어지는 시간이 인세 기준 24시간이었다. 육체로부터 영이 분리되어 저승으로 넘어갈 때까지, 원혼으로 구천을 떠돌지 않도록 길을 안내했다. 말이야 번지르르했지 남들은 사람 잡아가는 무서운 저승사자라 툭하면 욕했고 우리끼리는 욕받이 카운터 알바라 낮잡았다.
처음 교육받을 때 저보다 더 어려보이는 놈이 교관 모자를 쓰고 있기에 민호가 물었다. 죽자마자 바로 묶어 보내버리면 되잖아? 포승줄, 뭐 수갑 같은 거 없냐? 한 번 해보세요 그럼. 끝이 날카로운 눈매가 일순 휘어지며 해사하게 웃는 게, 묘하게 비웃음을 산 것 같아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지. 따끈따끈하게 갓 죽은 사람들이 진상 중 최고 진상인 줄은 별세계 얘기였다. 인정 못 하겠다며, 장롱에 꿍쳐놓은 돈이 얼만 줄 아냐며 시신 옆에 드러누워 떼를 쓰는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이제 유치원이나 들어갔을까 싶은 어린아이가 제 차가운 몸 끌어안고 우는 엄마 옷자락 붙잡고 있을 땐 떼어낼 수도 없었다.
대신 하루동안 민호는 최선을 다했다. 특기인 말빨과 친화력 살리고, 보기 좋을 때 죽어 여전히 괜찮다는 얼굴로. 염라는 사주팔자가 네 직업을 점지했다 말했지만 민호는 가끔 제 얼굴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 기분이 조금 나아져서, 용모단장을 하고자 건물 유리창을 거울 삼았다. 곧 아무것도 비치는 게 없어 머슥해지기 일쑤였지만.
온통 민트색 페인트로 조악하게 덧칠된 건물 내부. 벽을 따라 난 균열이 크고 깊었다. 쿨럭. 민호보다 반층 아래, 몸을 옹송그린 남자의 머리 위로 부옇게 먼지가 일었다 천천히 가라앉는다. 몇번 기침을 하던 남자는 이내 상체를 일으킨다. 무릎을 털고, 어깨와 발목을 차례대로 돌리더니 제자리에서 뜀을 뛴다.
어쩌다 넘어졌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휙휙 젓는 남자는 자신을 쳐다보는 민호를 발견하지 못한다. 타박타박 계단을 내려가는 이를 따라가던 민호의 발치에 무언가 걸렸다. 작은 인형. 멀쩡했다면 키링에 가까웠을 무언가, 그 고양이 인형은 때가 타 본연의 색을 잃어버렸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제 주머니에 넣은 민호가 그를 놓칠새라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그래서 오늘은 누구냐. 이십...오세 이민호?
이름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이야 수백 번 만났다. 오늘은 이가네 민호렷다. 세 걸음 앞에서 걷는 이의 갈색머리가 찬 바람에 나부꼈다.
스무살도 되기 전에 죽는 애들은 민호에게 곧잘 아저씨, 아저씨 소리 해대며 붙지만 오늘의 이군은 잘 구슬리면 알아들을 나이는 됐다. 비록 첫 만남은 계단참에서 볼썽사납게 거꾸러진 모습이지만, 염려했던 것보다는 귀엽게 생긴 친구였다.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들 중엔 정말로 아파서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에 비하면 뽀송하지.
인간 군상 다양하듯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가지각색이었다. 가족이나 연인을 만나러 가거나, 지금이 아니면 못 해보고 죽을 것들을 종일 쫓아다니거나-놀이공원에서 자이로드롭만 50번 타던 미친놈도 있었다- 그에 걸맞는 돈을 쓰거나 혹은... 직전에 거둔 58세 박모씨처럼 한데 앉아 기르던 동물과 시간을 보내거나. 아까부터 온갖 길모퉁이 및 건물 뒷편에 쪼그려 앉아 사료를 붓고 다니는 이군 덕에 그 연고도 없던 남자 생각이 났다.
이군을 알아보고 다가와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고양이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사탕이나 쭉쭉 빨고 있는 차사에게 하악질을 한다. 인간 말은 못해도, 이게 이민호와의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알고 저러는 거다. 낸들 데려가고 싶은 줄 아냐고요. 표정 변화도 없이 저게 몇 시간짼지. 들고 다니는 사료 봉투를 갈무리하던 이군은 세차게 울리는 전화를 받는다.
여자친구일까, 아니면 부모님. 혹은 친구.
벤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군 옆에 다리를 꼬고 앉은 차사 하나. 이 기묘한 동행을 싸고 도는 모든 소리가 방음벽에 흡수된 것처럼 고요했다. 민호가 담금질 당한 황천에도 뷰포인트가 있어서, 가끔 그 절벽에 올라가 가부좌 틀고 앉으면 이만치 조용하곤 했는데. 오늘의 이군은 으레 마지막날을 보내는 사람처럼 헛소리를 하지도 않고 부산스럽게 손을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뛰어오는 멀대 하나. 미동도 없이 앉아있던 이군이 벌떡 일어나는 걸 보니 기다리시던 그 분인가 보다.
"현진아."
남자는 형이 부르기에 급하게 나왔다고 숨을 몰아쉬면서도 파핫, 웃기에 바쁘다. 컨버스 하이 끈도 반쯤 풀어져 까딱하면 엎어질 상이다. 품에 사료 챙겨 다니던 이군이 그걸 놓치진 않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입으로 엄청난 타박을 쏟아내면서도 굳이 무릎을 꿇어앉아 그의 신발끈을 단단히 동여맨다. 그리고.
"진짜 오랜만이네."
결말 빤한 단막극을 시청한대도 소소한 재미는 있어야만 한다. 방금 그건, 아직도 꿇어앉은 이군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눈길로 둘 바라보는 민호 들으라는 거였지. 그래, 언제쯤 등장하시나 했다. 현진이라고 불렀나.
지긋지긋한 제 짝, 오늘의 그 애 이름은 황현진인가 보다.
*
꽁무니에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사자들에게도 짝이 있었다.
전생에서 가져온 이름도 있고, 근속연수 맞춰 승진도 하고 명퇴도 하는 사자들에 비해 그 '짝'이란 놈들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 끼어 오도가도 못하는 똥강아지 취급이긴 했어도 나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사자들이 망자를 인도하는 24시간 동안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가끔 소리도 못 내는 물건으로 현현할 수 있으나 보통은 망자의 연인이나 자식으로 분해 나타나는 어떤 것.
차사와 이름이 같은 오늘의 망자가 만나기를 원하는 이, 그게 현진이기에 부여받은 하루짜리 이름이었다. 현진은 저보다 조금 낮은 위치에 있는 이민호의 얼굴과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르는 차사의 얼굴을 다시 떠올린다. 아까 벤치에서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으로 아는 체를 하는 게,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단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저 현진도, 차사 민호도. 둘 중 하나는 갈 때가 되었겠거니 생각하는 쪽이 편했다.
세상사 최선을 다한다고 죄다 잘 굴러가기만 하는 건 아니어서.
죽음을 관장하는 이들에게 시간의 흐름이 무어 중요하겠냐고 묻겠지만 현진과 민호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저승보다는 이승에 가깝고. 이승의 시간에 맞춰 매일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는 가련한 중생들.
현진도 뜬소문으로만 들었으나 염라 앞에 가서 개지랄을 떨었다던 민호에겐 벌이라도 내려진 것처럼 휴일이 없었다. 덩달아 민호의 짝으로 점지된 현진도 그러했다. 매일 진을 빼면서 각계각층 남녀노소와 씨름하고 보내놓으면 또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에 대해 지금의 황현진처럼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인간이면 차사에게 대들기라도 하지, 늘 그런 모습을 띄는 건 아니었으니 만날 수 있는 주기도 불규칙해 그냥 입을 닥치고 있는 것이다. 닥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고.
죽음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다시, 또 다시.
셔터 내려놓는 마감시간 없고 번호표 뽑은 사람들만 많은 이 세계에서 일을 한다는 건. 수많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면서도 막상 저들의 정해진 끝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승에서의 날들이 새털같다 말하지만 여기엔 비할 수도 없지. 그래서 민호는, 현진을 비롯 저승의 친구들과 말할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그랬다. 얘들아, 나 지금 죽고 싶다.
그럼 현진이 대답했다. 방법 알면 공유하고 가요, 좀. 혼자 죽지 말고.
농담 따먹기가 일상인 그들에게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차사와 이름도, 얼굴도 같은 망자의 등장이란.
"바쁜데 불러낸 거 아니지."
"바쁠 일이 뭐가 있어요."
"웬 존댓말. 거리 두냐?"
"거리 둔 건 형이 먼저 아니었나."
둘은 대화의 내용이 무색할 정도로 가깝게 붙어 어깨를 부딪치며 걷고 있었다. 나이로는 현진이 두 살 어린 관계였다. 얼마전 대학 중퇴. 이민호는 이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다.
"나야 일이... 바쁘니까. 넌 지금 방학이니까 일도 있을 거고."
"방학 아니야."
"벌써 개강했어?"
"자퇴했는데."
그러나 '어떤 것' 정도의 취급을 받는 현진에게도 재량이라는 게 있다. 가령,
"뭔 소리야."
격앙된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이민호의 파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는다거나.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표정은 차사랑 똑같네. 하지만 어이없기의 정도로 따지자면 야간 운행하는 케이블카를 두고 역에서부터 남산타워까지 굳이 걸어서 올라가자는 지금의 작태가 더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한댔나. 현진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망자의 프로필이 그랬다. 그럼 타워를 안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는 중이렷다.
"형 없는 학교 어색하기도 하고. 더 이상 그림 그리기도 싫다고... 얘기했잖아."
"그렇다고 나와? 내가 없다고?"
"뒤에 덧붙인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네."
"웃기지 말고. 내 얼굴 그린 건 카톡으로 왜 보내는데, 그림 싫다는 새끼가."
"아... 쫌. 말해야 아냐."
늦겨울을 향해가는 시점이라도 해는 일찍 떨어지고 바람은 차갑다. 아무리 잘 닦인 길이라도 가로등이 드문 계단길을 올라가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라 현진은 그를 재촉한다. 뒤에 있는 차사보다 더 무섭게 굴면 어쩌자는 건지, 민호는 현진이 어거지로 구겨넣은 손도 내팽개친다.
"그리고 형도 학교 나갈 때 나한테 허락받은 거 아니잖아."
내가 가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만.
"허락을 왜 받냐?"
"그니까 나도 그럴 필요 없잖아. 쓸데없는 걱정 마... 나,"
괜찮다니까. 이민호는 현진의 뒷말은 듣지도 않고 지나친다. 말하지 말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학교를 먼저 관둔 쪽은 민호였다. 대외적 사유는 여기에 있지 않아도 얼마든 연기를 할 수 있다는 배짱이었고. 사실은 한 학기 벌어 한 학기 등록금 내고, 또 휴학하던 사이클을 견디지 못해 나가 떨어진 것에 가깝다. 야, 나 학교 관둘까. 자취하는 현진네 침대에 누워 하는 말이 그랬다.
현진은 학교에서 가까운 동네 고급 맨션에서 혼자 살았다. 친구야 있어도 집 더러워지는 꼴 참을 수가 없어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곳에 자연스럽게 침투한 민호였다. 그래서 현진은 들고 있던 붓 내려놓고 베란다 문 닫고 들어왔다. 형 돈 필요한 거면 내가 해줄까? 그 말이 혀끝에 맺혔는데, 나오지가 않았다.
덕분에 침대 위 상황이 요란했다. 상탈하고 입술만 달싹인 채 벙어리가 된 황현진과, 위아래 현진의 옷을 입고 누워 천장만 바라보는 이민호가. 그런데 여기서 돈이니 어쩌니, 아닌 척해도 현진한테 은근히 형 소리 듣고 싶어하는 민호에겐 좀 너무한 말이었다.
사실 둘은 같은 예대 소속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별 접점이 없었다. 하나는 그림 그리는 애고, 하나는 연기하는 애였으니까.
둘이 만나게 된 경로도 그들의 유명세에 비하면 심심했다. 제대하고 아직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찐따처럼 혼자 다니던 현진에게 같은 과 선배가 제안을 했다. 연영과 학공 올리는데 가서 좀 도와주고, 여친도 얻고 소정의 알바비도 얻으라고 했다. 여즉 민간인 답지않은 짧은 머리라 그 더운 여름날에도 까만 모자 뒤집어쓰고 페인트칠 하고 있는 현진에게 다가온 건 기대했던 썸녀 아니고... 웬 영화배우 뺨치는 얼굴의 남자였다.
덥지 않아요? 먹고 해요.
아 전 괜찮은데... 온통 페인트가 묻은 앞치마에 장갑이라 현진에겐 받아들 손이 없었다. 이름도 잘 모르는 연영과 학생은 포카리 캔을 주다말고 캡 아래 숨겨진 현진의 얼굴을 무례할 정도로 이리저리 뜯어봤다.
요새는 시비를 이렇게 터나. 눈매가 예사롭지 않아서 좀 쫄아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묻었는데요. 페인트.
예?
다 묻었다고요. 코랑, 뺨이랑.
그럼 닦을 걸 주고 가든가. 대충 아무 바닥에나 캔을 내려놓은 남자는 킥킥거리며 다시 제 무리로 돌아갔다.
요상한 첫만남. 무대 작업 도와주는 건 며칠 걸리지 않아서 남자와의 대화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민호야. 야, 이민호. 작업을 하는 도중에도 여기저기서 불려다니던 남자 때문에 주워들은 이름 정도 알 뿐이었다. 이후 학내 게시판에 붙은 공연 포스터의 디자인은 촌스러웠지만 현진의 눈길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왼쪽 아래 줄줄이 늘어선 캐스트 이름 중 꽤나 앞에 자리한 이민호라는 이름 석자가 궁금했다. 조명을 받은 얼굴은 어떻게 빛날지.
영화관도 누구랑 같이 갔던 기억을 꼽으라면 손가락 몇 개를 접어야 하는데, 하물며 공연이야 더했다. 과 교수님들이며 지인들, 가족들까지 모두 아는 사람들만 삼삼오오 모여 사진 찍고, 꽃과 선물을 바리바리 들고 있는 분위기였다. 견디다 못해 도망치듯 객석에 앉은 현진은 생각했다. 이 사람들의 시선을 다 견디고 저 위에서 연기를 하는 사람은 도대체 배짱이 얼마나 커야할지를. 그리고 현진을 객석으로 이끈 당사자는,
누구보다 컸다. 그 무대에서.
여름이 깊어가던 그날 밤 학공을 마지막으로 민호는 다음 학기 휴학을 했다. 현진과 민호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서로의 공간에 침투하면 침투할수록. 현진은 그때의 이민호를 그리워했고, 이민호는 무대에서부터 멀어져갔다.
그렇지만 현진은 그를 학교에 붙잡아둘 명분이 없었다. 말 그대로 현진이 있는 이곳을 나가서도 얼마든지 연기는 할 수 있었으니까. 둘은 붙어먹지 못해 안달난 사이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막말로 사귀는 것도 아니었고. 서로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 좀 우스웠으니까. 무슨 자격으로 말릴 수 있지. 그때의 현진은 그랬다.
곧 천장에서 눈을 돌린 민호의 시선이 현진의 얼굴에 머물러도. 그의 매끈한 입술에 제 입술을 내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진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이 남자의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결국 팔각정까지 올라오면서 이민호의 등어리만 봤다. 어쩜 그렇게 체력이 좋은지 단 한 번을 쉬질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지금 죽기엔 너무 한창 때다. 근데 쟤 화난 것 같은데, 괜찮겠냐? 앞서가는 망자의 뒤를 걷는 현진의 옆에 바짝 붙은 차사가 놀리듯 말했다. 그동안 질릴 정도로 붙는 망자들만 만나다가 오히려 저러니까 당황스러운데요.
"승질 보통 아니라 이거지."
"그건 뭐 차사님도..."
"뭐래. 닥쳐."
"참나, 말을 걸지 말든가."
보통 밤에 남산을 올라오는 건 서울 야경 보고 싶어서 아닌가. 부리나케 정상까지 올라온 이민호는 나무에 가려 하나도 안 보이는 자리만 서성거렸다. 형, 저기가 스팟인데. 그래도 민호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서울이라면 조금 더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현진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왔으니까 됐어."
"...그냥 여기 오는 게 목표였다고?"
"니가 그랬잖아. 남산도 못 가봤냐고."
"그랬...었지."
"남산 케이블카 안 타본 사람도 있냐고. 난 안 타봤거든."
"뭐야, 속상하기라도 했어?"
"같이 올라와 준다며. 걸어서."
여기 같이 오자고 한 것도 니가 처음이었고. 계단으로 삼십 분이면 올라간다고 말해준 것도 니가 처음이라. 그래서 와보고 싶었어.
현진에게 흘러드는 기억으로는 학교에서 소풍도 한 번 안 가봤다고 하기에 놀리는 광경뿐이었다. 부모님이 싸주시는 눅눅한 김밥조차 먹어본 적이 없다고. 그게 반복되는 민호의 휴학과 관련이 있었을까.
그럼 날 좋을 때 도시락 만들어가자 흘러가듯 얘기했던 걸 민호가 잊지 않고 있었나보다.
"그런데 왜 오늘 불러냈냐고 안 묻네."
오늘이 아니면 안 되니까 당신이 나를 불러냈겠지.
현진은 대답 대신 민호의 어깨를 감쌌다. 무서워서 전망대 쪽은 가지도 못하는 게, 그저 우거진 나무 사이로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처럼 반짝거리는 서울의 불빛을 야경 삼았다. 이것도 누군가에겐 야경일 수 있었다. 꽤 기억에 남는.
형 있잖아 학교는. 됐어, 말하지 마. 아니... 관두고, 바로 일 시작했으니까. 그래? 그래. 그동안 얘기할 시간이 없었잖아. 형 학교 나가고 우리 집에도 자주 안 왔으면서. 이사 안 했어? 안 했어, 형 올까봐. 기다렸다고.
"일부러 연락 안 한 건 아니야."
"...그렇겠지."
"그냥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거든. 계속 해야만 한다고... 내 몫이라고 생각했던 지리멸렬한 일을 끝내게 된다면 어떨지.
"연기를?"
"포함해서, 모든 걸."
꼭 본인이 선택해 죽음을 맞는 사람처럼 말하기에, 현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의 현진은 겉모습만 황현진인 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아직 이승에 있는 사람의 감정과 기억이 일부 흘러들어오고 있기에, 실재하는 현진이 민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지. 또 지금 민호와 대화를 하고 있다면 어떤 감정이었을지 대신해 느낄 수 있었다.
면역이 다 생겼을 법한 시간이 지났는데, 매일처럼 겪으면서도 이런 게 힘들었다. 오늘은 유독 그랬다.
"근데 높은 곳은 역시 좀... 무섭다. 이제 내려갈까?"
현진은 무의식적으로 차사가 있을 법한 곳으로 몸을 돌렸다. 차사는 그에게 주어진 24시간의 마지막에, 민호가 죽음을 맞았던 곳에서 그의 영을 인도할 것이다. 이민호의 끝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차사 뿐이다. 오늘 새벽에 거둬간 그 남자처럼, 이민호의 마지막 장면에 현진이 함께 할 지 아닐지는 그만이 알고 있었다.
현진은 이런 눈을 차사에게서 본 적 있었는지 골몰했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현진을 믿고 있다는 그 눈을. 이 미칠듯한 기시감은 설명할 길이 없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주고 싶다는 마음은, 역시 실재하는 현진의 것이겠지. 그렇죠, 차사님. 그에게만 들릴 무언의 언어로 말했다. 그러나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런 현진을 비웃고도 남았을 차사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학공 끝나고 그 술자리 기억나냐."
"아아, 형이 가지 말라고 붙잡았던 거."
"붙잡진 않았는데?"
"술 마시고 가죠? 그랬잖아. 다시 생각해도 구려."
"내가 그랬다고, 와."
"안 마시고 가면 얼차려 시킬까봐 나 쫄아가지고."
우리 과 후배한테도 시킨 적 없는 얼차려를 너한테 왜 시키냐? 이 새끼 진짜 웃기네. 이민호는 얼차려 대신 현진의 앞에 놓여진 소주잔이 넘칠 만큼 술을 부었다. 형 저 이만큼 못 마셔요. 그럼 채워놓고나 있어.
"그 술집 안주 다 맛없었지."
"진짜 최악."
"뭐냐, 그 낙지볶음처럼 생긴 거. 야채만 많은데 엄청 매워가지고."
"형 근데 저한테 왜 계란찜 밀어줬어요?"
"안 밀어줬는데."
"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형 진짜 갈 때 다 됐네."
아, 이 말은 취소. 현진은 제 입을 때렸다.
"나 친구도 없는데 그날 황현진 안 붙잡았으면 아무도 모르게 자퇴했을 뻔."
"오만군데 친한 척하고 다녔잖아요."
"야, 너야말로."
"자퇴하고 연락하는 사람 없는데."
"나도 없는데."
"황현진 있잖아요."
"넌 이민호 있잖아."
과 선배가 찐따 생활 청산하라고 붙여준 게 이민호였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신의 한 수였다.
거의 미끄러지듯 남산 자락을 뛰어내려와 아무 포차에나 자리를 잡고 앉은 게 한 시간째. 민호는 사실 오늘 서해안을 가고 싶었다며, 현진이 혼자 바다를 보고 왔던 게 부러웠다고. 그게 안 되니 남산에 온 거고 아쉬우니 술 한 잔만 마시고 가라고 했다. 술이 조금 들어가 뺨이 발갛게 오른 민호는 그런대로 귀여웠다. 얼마든지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해도 얼굴 하나 달아오르지 않는 차사와 현진의 존재로서는 절대 볼 일 없는 광경이어서 더 그랬다.
취하면 이런 얼굴이려나. 현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손틈으로 스쳤다.
"뭐해."
"형 머리에 뭐 묻어서."
"제대로 뗀 거 맞아? 뭘 쓰다듬고 있어."
눈치 하난 누구 닮아 빠르다. 머쓱해진 손을 거두고 헛기침을 했다.
"야, 자퇴생은 시간 많지."
"아니. 바쁜데."
"이럴 때만 꼭 반말... 있잖아. 우리 아까 만난 공원 근처에 내가 밥 주는 애들 있거든."
"고양이요?"
"응. 혹시, 내가 부탁하면 애들 좀 챙겨줄 수 있냐."
"어디 갈 것도 아니면서. 형이 챙겨요."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 만약에 내가 멀리 여행을 가거나... 아프거나, 뭐. 아무튼. 해 줄 거지?"
스팟 어디인지 내가 지도 캡쳐해서 보내줄게. 민호는 휴대폰을 켜서 열심히 스크린샷을 때린다. 마치 건너편에 앉은 현진이 당연히 그러마,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현진은 아까 민호가 넘치게 부어놓은 소주잔을 든다. 알겠어요. 메신저로 보내놔요. 확인할게. 목구멍으로 꼴꼴 넘어가는 술이 달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몸은 액체의 쓴내만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민호에겐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현진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형, 좀 뜬금없는 소린데요."
"어어."
"그... 연극했을 때."
"아, 옛날 얘기 그만하자. 술잔 비었냐?"
"형이 먼저 꺼내놓고. 아, 들어봐요."
이것은 이민호가 아는 황현진이 전해주고 싶었던 말이다.
"조명 받던 형 얼굴이 진짜 아름다웠대요."
"뭐?"
"아니, 아름다웠다고."
"미쳤구나."
물론 이것 또한 '어떤 것'의 재량이다. 누구 말처럼 단막극에도 소소한 재미는 있어야 하니까.
"와 눈온다."
"갑자기? 오늘 엄청 따뜻했는데."
쓸데없이 낭만적인 광경이었다. 민호는 영 관심 없다는 듯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현진 너머로 이어지는 길을 보며 말한다. 이렇게 오면 아침에는 눈 하얗게 쌓이겠네.
그리고 현진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눈에 띄게 옅어진 이민호의 몸 너머를 본다. 차사가 곧 거둬갈 망자를 두고 어디로 사라졌나 싶었더니 그새 곁에 와 있었다. 민호를 등진 채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듯, 현진의 눈에는 이민호와 차사 민호가 겹쳐 보였다.
"그래도 형이랑 같이 있어서 좋았어."
이건 들릴까.
"학교에서?"
"...포함해서, 지금도요. 전부."
그의 마지막으로 현진을 불러내줘서, 많이 고맙다고.
*
차사 민호와 그의 짝은 어느 지하철 역 플랫폼에서 만났다. 인세의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자정을 훌쩍 넘겨, 여명이 밝아올 시간이었다. 그들의 고단한 하루는 늘 여기서 끝난다. 아직 현진은, 그대로 현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곧 플랫폼으로 들어올 첫차에 몸을 실으면 이민호가 불러낸 황현진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또 다음 망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이승도 저승도 아닌 세계에 나타나 하루만큼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야. 황현진."
"네."
"아까 그 애랑 나랑 닮았냐."
"...왜요?"
방금 건너간 혼에 대한 건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여기에서 그를 떠올리거나 이야기하면, 잘 건너가던 영도 뒤를 돌아보는 일이 생기게 되니까.
현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돌렸다. 오늘은 유독 피곤하네요. 차라리 강남에서 이 술집 저 술집 돌아다니며 소리지르는 부장님들 상대하는 게 낫겠다. 하루 되기도 전에 보내버리면 되잖아. 아니면 우리 진짜 망자용 포승줄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건의해 보는 건...
"저기 비치는 얼굴이 아까 걔랑 똑같네."
삐딱하게 선 민호의 모습이 스크린도어에 그대로 비친다. 현진 쪽은 늘 그래왔듯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항상 궁금했거든. 기억이 날듯 말듯 했어. 이승에서의 내 모습이 어땠는지."
"나쁘진 않았어요, 뭐."
"혹시 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했던 사람도 너였을까?"
"...차사님의 24시간. 말하시는 거죠."
"응."
그건 민호도, 현진도 확신할 수 없었다. 민호를 염라 앞까지 데려다놓은 저승사자의 얼굴도 기억에선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차사급도 되지 못하는 현진은 더더욱 그랬다. 현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만가지의 모습으로 변해온 아주 초기의 기억들은 누군가 일부러 지우는 것처럼 희미한 잔상들로만 남았다.
사실 현진은 제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름도 없는 지금의 상태는, 벌에 조금 더 가까웠으니까.
"내가 찾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진짜 골때리네, 우리."
"곧 차 들어올 거예요. 시간 다 됐어요."
차사는 왜 현진을 보고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우는가. 아까 포차에서 등을 돌리고 있던 차사의 얼굴도 이랬을까.
"짜증나니까 한 번만 안아봐도 돼?"
"...취했어요?"
"아, 내일은 너 절대 사람으로 오지 마라. 아니 한동안 오지 마."
"그건 내가 정하는 것도 아닌데."
현진이 관자놀이께를 긁으며 어설픈 웃음을 짓자 민호가 먼저 와 현진의 품에 안겨버렸다.
그러니까 차사님. 아까 남산 위에서 물어봤잖아요. 이건 실재하는 현진의 마음인 거냐고. 그 물음에 답해달라고 할 때는 모습을 감추더니 이제 와서... 민호는 현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이유없이 훌쩍거렸다. 그래, 이유가 없어야 했는데. 현진은 민호가 우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게 슬프진 않았다. 다만 저 멀리서 철로를 밝히는 기차의 헤드라이트가 너무 밝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저 차에 민호가 오르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거 못 돌려줬거든."
현진이 본 중 가장 못생긴 얼굴의 민호가 제 소매에서 작은 인형 하나를 꺼낸다. 아마도 키링이었을 작은 무언가.
"이거 뭔데요."
"아까 그 애가 갖고 있던 건데 손에 못 들려 보내서."
"알았어요."
"부탁할게."
이대로 현진은 없어질 존재니 망자의 분실물도 함께 처리하라는 소리다. 차사에게서 건네받은 인형을 아까의 민호처럼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마음이 초조해져서 그렇다. 이제 곧 열차의 문이 열릴 것이다.
"먼저 간다."
"인사는 무슨... 평소에도 이렇게 좀 해요."
"그러게, 낯간지러워서 죽겠네. 아. 간다고. 알겠냐."
여느 때처럼 민호를 실은 차가 먼저 떠난다.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의 진짜 행선지는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곧 만나요."
현진은 차사의 코트자락에 여즉 붙어 녹아내리지 않았던 눈송이들을 떠올리며, 다음 차가 오기 전까지 텅 비어버린 플랫폼을 응시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어떤 모습이나 어떤 이름이라도 지금처럼 알아봐 주기를. 현진에게 이런 사람은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이 바람이 분수에 맞지 않게 크다면 어디에 계시는 신이든 그 또한 눈감아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춘삼월에 웬 한파일까. 민호는 옷장 어딘가 쳐박혔을 장갑이 애타게 필요했다. 하필 신호도 죽어라 안 바뀌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으려니 케이크 박스를 들고 있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꽃샘추위는 삼월초에나 있지, 현진의 생일을 넘어가면 완연한 봄 기운이 가득해질 텐데 이건 너무하지 않냐고.
[형, 금방 온다며. 왜 안 와!]
"안 그래도 니 욕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먼 데서 케이크를 사오래!"
[진짜 웃긴다 형... 그 집 디저트 사진 먼저 보낸 건 형이거든?]
"드럽게 춥네, 드럽게 추워. 야. 박스에 달린 성냥 켜도 되냐."
[성냥팔이도 아니고. 조심해서 오라고, 제발. 아니면 내가 나갈까. 나 옷 입어 지금.]
"가만히 좀 있어. 너 나오면 그대로 얼어죽어."
아. 신호 바뀌었다.
"저기요. 이거 떨어트리셨는데."
어떤 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민호를 잡아끌었다. 방금까지도 횡단보도엔 저 뿐이었는데.
"네? 제가요?"
"이 키링이요. 그쪽 거 맞죠?"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키에 달린 고양이 인형은 묘하게 생활감이 있었지만 민호의 것은 아니었다. 금방 횡단보도를 지나간 사람의 물건이려니 싶어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키링을 든 남자의 눈매가... 너무 익숙했다.
"이건... 제 거 아닌데요. 근데 우리,"
빠-앙.
형. 여보세요, 형. 수화기 너머로 민호를 찾는 현진의 목소리와, 제 뒤에서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트럭의 크락션 소리가 겹쳐 울렸다.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 차체가 몰고온 바람이 뒤늦게 민호의 볼을 때릴 정도였다.
아직 초록불인데. 시간은 24초나 남아 있었다.
"아니시면 어쩔 수 없고요. 건너시죠."
민호에게 물건을 줬다 빼앗는 것처럼 키링은 다시 남자의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뭐야, 진짜. 묘하게 재수없네. 잠시 얼을 탄 민호는 수화기를 가져다 대며 남자의 뒤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넜다.
"어, 현진아. 나오지 말라니까. 형 다 왔다고."
갑자기 수화기 너머로 클락션 소리가 나기에 걱정했단다. 이럴 때 은근히 귀엽다니까. 민호는 입 꾹꾹이 몇번으로 웃음을 삼켰다. 사실 신호도 안 보고 직진하는 미친 새끼가 있긴 했는데 어떤 남자가, 그 말을 하며 휘 둘러본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뭐지. 방금 민호를 앞서가지 않았던가. 캡 아래 눈매가 정말 낯익었는데.
이 동네 사람이라면 또 만나겠지. 지금은 너무 춥고 바람이 많이 부니까, 지금 말고. 언젠가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