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ys Love Boys
익명
패드 화면을 슥슥 넘겼다. 처음 계획은 딱 36페이지였는데, 이것저것 더 넣고, 사이즈며 내용이며 편집 좀 하다 보니 그 두 배를 넘겼다. 제목과 목차 부분 포함 77페이지.
“중철은 4배수로만 찍을 수 있는데.”
“아..., 페이지도 늘어났는데 그럼 그냥 떡제로 할까.”
“너희 무슨 작당을 하는 거니?”
‘지나가던’ 민호의 고모가 물었다. 사실 정말 지나가던 건 아니고, 둘이 원래 너무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이 앉은 곳이 고모 댁의 거실이었으니까. 고모는 그저, 계속 소파에 앉아계셨다.
“책 만들 일이 있어서요...”
현진이 그쪽을 돌아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해 시선이 약간 아래로 떨어졌다.
“얘네 동아리 일이래. 친구 작품에 꼈대.”
민호는 태연했다. 애초에 그 정도 뻔뻔함이 아니고서야 친구를 고모 댁에 데려올 수 없기도 하다. 현진이 여전히 시선을 흐리며 거실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패드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품 안쪽으로 살짝 기울인 상태였다. 당당하기에는, 그놈의 ‘친구 작품’에 좀 깊게 끼었다.
민호가 현진을 한 번 힐끔거리고, 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척하며 말했다.
“고모 몇 시에 나가?”
“으응, 한 10분 후에. 너네 이따 저녁밥은 어떻게 할래?”
“냄비에 감자탕 있는 거 봤는데.”
고기 내가 다 먹는다? 민호의 말에 고모가 웃었다. 그래도 되고, 아니면 뭘 따로 시켜줄까? 물어도 그냥 고개 젓는다.
“친구랑 많이 먹어. 한 번 끓고 뼈까지 따뜻해지면.”
고모도 시계를 힐끔거린다. 시간이 좀 남긴 했지만, 조카도 재촉하니, 멀뚱히 앉아 마냥 수줍어하는 조카 친구의 일을 구경하기도 그랬다. 더 관심 두지 않고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현진도 좀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는데, 그 마음을 아는지 민호가 그를 작게 비웃었다.
“그니까 그냥 방으로 가자니까...”
현진이 머쓱함을 못 이겨 괜히 민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 찔렀다. 억, 생각보다 너무 세게 쳤는지 그가 허리를 고꾸라뜨렸다. 헉, 잘못 맞았어? 현진이 깜짝 놀라 그쪽으로 몸을 숙여봤지만, 그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뻥이지?”
이거 전적을 보면 분명 같잖은 장난일 텐데, 혹시 진짜 아픈 걸까 싶어 조금은 걱정됐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조금 더 숙이고,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미리 짜둔 안무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민호의 몸도 약간 들렸다. 상대의 머리카락이 살짝 흩어지며, 틈 사이로 빛이 반짝였다. 꽈악. 옆구리를 꼬집는 고통도 같이 번쩍였다.
“아오! 그럼 그렇지!”
현진이 민호의 등짝을 후려쳤다. 꽤 큰 소리가 났고, 딱 그만큼 아팠기 때문에, 옆구리로 들어오는 고통도 배가되었다. 민호가 그대로 갚아주고 있는 탓이다. 감히...? 괘씸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안에 금세 웃음이 스며드는 바람에 짜증도 흐지부지 풀렸다.
민호가 현진을 팩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현진은 그에 맞춰 과장되게 물러나 주었다.
“까불어.”
“까고 있네.”
실실 웃는 현진의 볼을 짧지만 세게 한 번 잡아당겼다. 손은 금방 떨어졌지만 얼얼함은 그보다 오래 갔다.
서로 그렇게 마주 보고 있는 시선 사이로 목소리가 들렸다.
“다 싸웠으면 고모 간다.”
“덜 싸웠으면 어쩔 거였는데?”
“좀 더 구경하려고 했지.”
“아, 고모!”
몇 발자국 떨어져 있던 고모였다. 고모는 조카의 웃음 섞인 투정을 신경도 쓰지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래도 좋은 구경을 한 값으로 지폐 한 장을 받았다. 우와! 안녕히 다녀오세요~ 그 덕에 조카 친구의 해맑은 배웅도 받을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일이다.
“가셨다. 패드 다시 보여줘봐.”
“진작 방에 갔으면 됐잖아.”
“우리 고모가 신경 쓰게 하지 마.”
거실에 있는 게 더 신경 쓰이지 않나? 현진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민호는 대꾸하지 않았다. 으응, 님이 다 옳습니다요. 현진도 포기하고 패드 잠금을 풀었다. 77페이지를 처음부터 다시 빠르게 훑는다. 절반보다 조금 많게는 줄글이었지만, 중간중간 삽화가 꽤 많았고, 또 일부는 만화로 채워져 있었다.
“근데 이거 진짜 니가 그린 거야?”
민호가 여러 장을 한 번에 볼 수 있도록 화면을 조정해놓고, 몇몇 삽화를 손으로 짚었다. 패드 액정이 아직 식지 않아 뜨끈했다.
“아 그렇다니까. 왜 못 믿는 건데?”
“현진이가 22년 만에 처음으로 재능이란 걸 찾은 것 같아서 눈물이 나가지고...”
“미친 거 아냐? 말투 왜 이래, 누구한테 배웠어?”
눈물짓는 시늉도 안 하면서 입만 살았다. 현진이 민호를 살짝 흘겼다. 아주 거짓말도 아닌 건 알아서 더 핀잔주지는 못했다. 22년 만에 적성을 찾은 게, 어쩌면 맞기 때문이었다.
황현진 같은 애들은 꽤 많았다. 공부 안 하고, 그래서 못 하고. 집에서 달달 볶아서 대학을 보내려는데, 공부 싫으면 체육이라도 해보랬더니 체육은 취미 아니면 절대 싫다고 했다. 그러더니 재수하는 중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춤이라도 좀 춰보려다 재수 없게 다치기까지 했다. 이건 그래도 덜 흔하지 않을까? 현진이 속으로 좀 웃었다.
동시에 민호도 여러 장면을 떠올렸다. 병실에 누워 질질 짜면서, 자긴 이제 군대 안 가도 된다며 웃는 척을 했다. 흥 웃기는 소리, 내가 너 꼭 공익 보낸다. 억울하게 어떻게 너만 면제일 수가 있어? 대충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날의 일을 아주 짧게 추억했다. 딱 슬픔이 밀려오기 직전까지만.
“아무튼 나한테 고마워해. 어디 가서 상 받으면 소감할 때 내 이름 부르면서 울고.”
“멍청아. 내가 연예인이냐?”
“오, 또 까부시겠다?”
이번엔 민호도 봐주지 않고 손을 쫙 펴 현진의 등짝을 내려쳤다. 짝, 소리가 거실 전체를 울렸다. 미친 개쎄네..., 그 짜릿한 고통에, 현진이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몸을 뒤틀었다. 민호가 그 귀여운 낙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철판에 올린 것 같네. 맛있겠다.
“주먹 아닌 걸로 감사해라. 페이지 다시 보여주고.”
“여기..., 흑, 존나 아파..., 알아서 가져가세요옹...”
“오냐.”
민호가 계속 삽화 몇 개를 들춰봤다. 나름대로 조사를 해서 구색을 갖춘 서양식 기사 복장의 남자도 있었고, 칼과 지팡이 따위를 들고 싸우는 두 남자도 있었다. 지팡이? 자세히 보니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전형적인 마법사처럼도 생겼다.
좀 진정이 되었는지, 현진이 그림을 구경하는 그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옆으로 바짝 붙었고, 사실 바로 옆보다는 조금 뒤로 빠졌다. 턱을 어깨에 붙여 올릴 수 있도록. 턱 끝으로 승모근을 몇 번 콱콱 찍었지만, 민호가 들어 올린 주먹에 즉시 그만두고 얌전히 더 붙었다. 사람 살갗에서 얼핏 나는 냄새까지 맡아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호가 입을 열었다. 닿는 머리카락이 간지럽기는 하지만, 무시했다.
“판타지 소설이라고 했지? 이건 그거의, 뭐냐, 팬...아트.”
“...으응...”
“제목이 뭐야? 얘네가 주인공?”
민호가 싸우는 두 남자 캐릭터를 번갈아 가며 톡톡 쳤다. 현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제목이 너무 길어서 잘 기억이..., 주인공은? 아니?”
“...주인공이 아냐?”
“한쪽만.”
민호가 물으면 현진이 대답했다. 대답이 하나같이 영 시원찮기는 했지만, 진짜로 많이 궁금한 건 아니라서 상관없었다.
현진이 민호의 몸에 붙지 않은 다른 쪽 손을 가져와 캐릭터 하나를 가리켰다. 그 캐릭터는 빗장뼈는 넘겠다 싶을 만큼은 긴 금발이고, 눈은 파랗고, 뭐, 미형이다. 공들여 그린 태가 났다. 망토 따위를 두르고 있었는데, 격렬한 전투가 있었는지 많이 헤졌고, 그 사이로 상처도 보였다. 그는 반쯤 부러진 지팡이로 칼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아, 나무로 칼을? 민호가 호기심에 그 캐릭터와 그의 지팡이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지팡이는 무슨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나 들 것처럼 길었고, 그건 어디서 구했는지 넝쿨처럼 배배 꼬인 나무로 만들어졌다. 괴이쩍게 커다란 녹색 구슬 같은 게 그 지팡이 머리에 달려 있기도 했다.
“얘가 주인공 세력의 적? 같은 건데.”
“그러면 뭐, 악당? 빌런?”
“비슷한데, 사실 비중이 큰 악당은 아니고...”
현진이 간결하게 설명해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어쩔 수 없이 자꾸 더듬거렸다. 먼 기억까지 들춰 천천히 정리해본다. 친구가 했던 말, 일부 장면은 참고하려고 직접 읽었지만, 현진이 접한 대부분 정보는 친구의 ‘캐해석’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원작이 되는 소설이 대작은 아니어도 나름대로는 인기가 좋다고 듣기는 했는데, 어쩌고저쩌고 제목이 너무 길어서 현진이 잘 기억을 못했다. 정확히는 <이계아싸> 뭐 이런..., 이런 존나 이상한 줄임말로만 알고 있었다. 아니 <이계찐> 뭐 이런 거였나. 대체 그게 뭔데...나를 줄임말 모르는 아싸로 만들지...?
“음, 암튼 메인이 되는 악당은 좀 시원시원해. 딱히 깊은 사연도 없고, 그냥 나쁜 놈인데 그게 멋있을 때도 있고.”
“흠.”
“대신 얘는 조무래긴데, 얘한테 사연 몰빵한 거.”
“아아~”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진도 이제 좀 가닥을 잡았다는 듯이 민호에게 천천히 설명했다. 불우한 과거가 있고, 그 과거를 딛고 잘 살려다 재수 없게 악당한테 이용당하는 부분이나, 그걸 알게 된 주인공이 그를 구하려고 꽤 노력했다던 내용, 그 보답으로 이 캐릭터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줬는데, 사실은 우두머리의 함정이라 전혀 도움이 안 되었던 원작 사연 같은 것들. 그래서 목숨을 바쳐서, 어쩌고...
“아이고, 저런...”
민호가 조금 몰입했는지 안타까운 신음을 내며 몇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현진이 꽤 신나서 더 설명해주려고 했는데...
“그래서 주인공이랑 동인지가 나오는구나...”
“뭐...?”
실패했다.
“그림 보니까..., 금발이 수(受)인 거지? 요즘은 또 이름이 다르...”
“뭐, ...뭐뭐뭐무머, 뭐래?!”
현진이 소리를 빽 질렀다.
작정하고 숨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몰라주길 바랐다!
“난, 내가 진짜 모를 거라고 생각한 니가 더 신기한데.”
“혹시나 했지...”
“우리 고모부가 하는 인쇄소에서 맡기고 싶대서 나 찾아온 거잖아? 거기가 색감이 좋다고.”
“형이 내용에까진 관심 안 둘 줄 알고...”
(비)공식 동인남이 되어버린 현진이 입술을 쭉 내밀고 조용히 투정했다. 물론 아까 ‘동인남 같은 게 아냐! 내가 내는 게 동인지는 맞지만, 동인지는 취미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낸다는 뜻이거든? 이건 앤솔로지란 말야!’ 이 비슷하게 소리치기는 했다. 그런 거센 반박을 하는 부분이 가장 그를 오타쿠...동인남...뭐 그런 걸로 보이게 한다는 것을 현진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민호가 몸을 웅크리고 쪽팔려하는 현진에게 위로를 건넬 겸 입을 열었다. 위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나 인쇄소 집 조카로 24년을 살았다.”
“...!”
“이런 건 표지 디자인만 봐도 알아.”
적당히 멋진 필기체로 <Only lovers left alive>라고 적혀 있는 표지를 가리켰다. 밝지만 침침한 배경색 위에, 제목 밑으로 빈공간 중앙쯤, 원래는 사진이 들었던, 깨진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있었다. 와인잔 안에 담긴 채였다. 잔 안에 물이 반 정도 차 있었는데, 그 물 때문에 펜던트 안의 사진이 굴절되어 잘 보이지 않는 컨셉이었다.
“뭔 의미인진 모르겠는데, 나 이런 거 많이 봤어.”
“아 짜증나~!”
현진이 얼굴을 감쌌다. 작은 얼굴이 쏙 가려져 오히려 웃겼다. 머리만 숨기면 된다고 믿는 바보 같았기 때문이었다. 민호는 참 장하게도, 이번에는 부끄러움 때문에 뒤틀리는 귀여운 낙지를 더 놀리지 않은 채로 기다려주었다.
짧은 정적 후에, 현진이 조그맣게 말했다.
“주인공이랑 이 마법사 엮는 게이 팬픽션 맞아.”
“오...”
민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해 뭐하냐구.
“그리고 내가 좋아서 하는 건 아니야.”
“그럼?”
민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현진은 민호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거 만드는 여자애가, 선밴데, 아, 그래도 동갑인데, 끝나고 내 공모전 도와주기로 했어.”
“그래서 삽화를 일곱 장이나... 편집도 하고?”
“우리 과에서 프로그래밍 비슷한 거라도 할 줄 아는 사람 딱 3명 있는데, 걔가 제일이야.”
“프로그래밍?”
“그런 게 좀 필요한 공모전이야...”
순수미술 하는 사람도 프로그래밍이 필요한 현실 규탄한다...! 이것저것 보장하라...! 현진이 우는 척을 하며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급하게 눈을 맞춰온다. 민호에게 무슨 동의라도 바라는 것처럼 급해 보였다. 매우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민호는 알면서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형도 알잖아...삼수나 해서 대학 들어왔는데, 뭔가 좀 더 해봐야지...”
“뭐라고 안 했어.”
“...알아. 그래서 도와주는 거지?”
“어..., 그렇지. 그니까 빨리 취직해서 효도해.”
풀죽은 낙지를 대충 도닥였다. 현진이 안심하고 다시 민호에게 들러붙었다. 계속 거절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냥 진작 방에나 들어가 있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치만 방에 있으면 키스할 수도 있으니까 참는 게 좋겠지. 그러면 고모도 걱정하실 거고.
“야 아무튼 이거 대충 다 된 거 맞지.”
“웅. 그렇게 40부...”
“만들면 나도 하나 줘.”
“...이거를?”
현진이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이 형이 그런 취미가 있나? 가늘게 뜬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민호가 웃었다. 젓가락 가져와서 찌르기 전에 깔아. 어우, 넵.
고모부가 퇴근한 후, 적당한 핑계로 인쇄소에 남은 민호가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책을 만들었다. 나름 배운 가락이 있어서 몇 시간쯤 후딱 버리고 나니 어찌어찌 성공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파본 따위가 생기면 또 뽑으면 되기 때문에 괜찮았다. 성공할 때까지 하면 성공이잖아.
“......”
민호가 지쳐 주저앉았다. 구석에 기대 아까 뽑은 41권의 책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럭저럭 인기 있을 만큼 재미있다는 원작 덕인지, 특별한 점 없는 팬픽도 그냥저냥 재미있었다.
슬픈 사연을 지닌 금발 마법사와 강한 힘을 가졌지만 무슨 저주 때문에 결국 친구는 한 명도 갖지 못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처음에 그 마법사와 친구가 되고 싶었으나, 상황이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마법사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뭐?
“웃기긴 한데?”
현진의 그림도 나름 절묘했다. 그의 선배가 삽화 한 장면 한 장면의 모든 디테일을 지시했고, 현진은 그걸 최대한 시키는 대로 그려냈다. 일부는 컴퓨터 작업으로 했지만, 꽤 많은 부분을 무식하게 펜으로 직접 그렸다고 들었다. 저런, 공모전이 뭐라고. 덕분에 글과 삽화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기는 했다.
민호가 이런 소설이나 만화를 정말로 인쇄소에서만 접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읽어본 적도 꽤 있었다. 한창 정체성인지 뭔지를 고민하던 어릴 적의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는 큰 도움이 안 됐다. 대부분의 창작물이 실제 게이나 바이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 읽은 아름다운 소설들의 영향을 받아 다소 동화적으로 말랑해진 민호의 마음가짐으로는, 지저분한 사내새끼들과 어울리는 데 방해만 되었다.
으응 민호는 섬세한 공주니까~ 그가 이상한 음으로 흥얼거렸다. 누구라도 민호를 새침한 부적응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체 생활을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당연히 공주 노릇도 안했다. 그런데도 꼭 가끔은, 자신을 좋아하는 드러운 새끼들이 그런 얘기를 하곤 했다. 민호는 그런 놈들에게 더이상 설득을 시도하지 않는다. 계속 해봐, 공주의 이름으로 죽여버리게.
“왜.”
[이따 몇 시에 가지러 갈까 해서~]
“지금도 되는데?”
[엥? 지금 아침 7시 반인데?]
“아 니가 전화해서 아침 아닌 줄?”
[미아아안...괜히 걱정돼서~]
현진이 전화기 너머로 배시시 웃었다. 흠, 낙지볶음 주제에. 별로 화나지 않았기 때문에 혀만 한 번 쯧 차고 내버려 두었다. 민호가 아무렇지 않다는 걸 알았는지, 현진이 곧 혀 짧은 소리로 더 애교를 부렸다. 귀여우려는 의도마저 희석돼 더는 느껴지지 않을만큼 과도한 행위였다. 황현진은 미쳤을지도. 하지만 민호는 현진이 이 짓거리를 본인한테서 배웠다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그의 업보였다. 이제는 현진이 더 자유롭게 이 스킬을 구사했다.
“회사 창고에 놓고 갈 테니까, 이따 알아서 찾아가. 어딘지 알지?”
[으으응, 알어~ 고마워요옹, 사댱행~~]
“응, 아, 수령하고 나서 우리 집으로 와. 오면~”
[오며는~?]
“사랑의 매가 널 기다리고 있지. 넌 죽었어.”
민호가 그러고 전화를 뚝 끊었다. 끊어지기 무섭게 전화가 두 번 더 오고, 무시하고 안 받으니 어이없네, 웃겨, 짜증나, 이민호 완전 또라이 아냐? 하는 메시지들이 바로 날아들었다. 민호가 전부 무시하고 인쇄소를 나섰다. 아까 읽던 책은 챙겼다. 더 읽을 생각이 있는 건 아니고, 현진이 그린 그림을 가끔 보고 싶을 수도 있어서였다.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고 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늘어지게 자야지.
오전에 들어와 잔 걸로 아는데, 눈을 뜨니 바깥이 파랗게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커튼도 안 쳤다. 한숨 돌린다는 게 그만...
“오...나 이젠 밤 못 새는데...”
민호의 체력은 전역 후 6개월까지 절정을 찍었고, 그 뒤로는 순조롭게 하향곡선을 탔다. 민호는 이 현상이 노화까지는 아닌 것같고, 빡센 운동을 다 그만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고생을 좀 했더니 유격 비슷하게 힘든 건 거들떠도 보기싫었다. 그래선지 밤샌 결과가 좋지는 않았다. 어쩐지 기분도 좀 싱숭생숭했다. 오랜만에 이상한 소설 봐서겠지. 그 책은 어떻게 끝났을까?
“일어나셨나요옹?”
“악!”
깜짝 놀랐다. 번쩍 일어나 앉으니 원룸 부엌 쪽에서 황현진이 국자를 들고 걸어 나왔다. 민호의 귀여운 노란색 앞치마를 빼앗아 입은 채였다. 원래 황현진이 사줬던 거라, 입든 말든 큰 불만은 없었다.
“너 뭐야?”
“뭐냐?니? 오라며?”
“살려면 안 왔어야지?”
어이가 없어 멀뚱히 현진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민호에겐 황당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황현진도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가 안 되어 주변을 조금 둘러본다. 너무 당당해서 잠깐 자기 집이 아닌 줄 알았다.
현진은 태연함을 넘어 당당했다.
“웃겨~ 와보니까 옷도 안 갈아입고 대충 누웠길래 내가 양말 벗겨주고 이불 덮어줬구만.”
“의리가 있네.”
“바지는 벗기려니까 기분이 좀... 그래도 내가 벨트는 풀어줌~”
“오. 이렇게 기특한 애는 아닌데...?”
농담 반 칭찬 반 몇 마디에 신나, 현진이 들고 있던 국자를 좀 흔들었다.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게 아니라서, 그냥 폼내려고 들고 온 새 국자였다. 어차피 국 같은 걸 끓일 생각도 없었다.
이 집엔 식재료가 많으니 파스타 정도는 뚝딱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자를 제자리에 놓고 그릇장을 뒤적거렸다. 이건~ 지난번에 이민호가 스테이크 해준다고 꺼냈던~ 프라이팬~, 이건~ 내가 설치다~~ 홀랑 태워서 새로 사 온 소스팬~ 현진이 자꾸 흥얼거렸다. 집안 공기는 포근했고, 은은하게 즐거움이 묻어났다.
그래도 되나?
민호가 문득,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너...내 자취방에 그렇게 많이 왔었나?”
“...우리 반동거니까...아니야?”
“아니야.”
“아잉~”
둘의 관계에서 종잡을 수 없는 헛소리를 하는 쪽은 단연 이민호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민호가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현진의 헛소리 레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민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진은 형 눈 큰 거 안 그래도 다 안다며 웃고 넘겼다. 황현진 주제에 여유로운 척을 하다니...,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아니, 가만있어봐.”
이 집 사는 사람처럼 편한 옷을 입은 현진이 발걸음을 딱 멈췄다. 그럴까? 하는 꼴이 느끼하게까지 느껴졌다. 언제 갈아입었지?
민호와 현진은 그 상태로 꽤 오래 대치했다.
체감상 참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현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민호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민호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뒤로빼며,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그래도 현진은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숫제 코앞이었다. 이상한데. 오늘은 진짜로 이상한 날이었다.
현진이 말했다. 긴장한 몸이 뻣뻣했다.
“요리 별로면 그냥 형 옆에 붙어있을게.”
“야...”
“생각해보니까 배달음식도 괜찮을 것 같아.”
“...친구로 지내자며.”
이 말은 금기다. 금기를 어기고 민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민호가 그만큼 겁을 먹은 것이다. 위축되고 당황했다. 마음 한구석이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곧, 움츠러든 마음의 공간을 비집고 뜻모를 분노도 솟았다. 현진의 짜증 담긴 시선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는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이 미친놈이...
“......”
“내가 존나 열심히 협조해주고 있었잖아.”
“니가 협조는 무슨, 씨발...”
둘의 인상이 동시에 와락 일그러졌다. 그들은 참 다르게 생겼는데, 이러는 찰나에는 꼭 거울이라도 본 것처럼 닮는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열 살 전후에 만나 친분을 쌓아왔고, 교복 입던 시절부터 시작해 5년 이상 연인으로서 사귀었다. 헤어진 지는 8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상대 부모님께 안부 인사도 드릴 만큼 ‘친한 친구’로는 남아 있었다. 현진은 그게 불만이었다.
“이민호..., 진짜 친한 친구 없지? 어떤 친구가 이딴 식으로 헌신해.”
참 맞는 말이다. 이민호는 전남친이 아무 이유로 불러서 도와달라고 부탁해도 정성껏 해줬다. 발목 빠개진 사람 병수발하던 때랑 전혀 다를 게 없다. 그는 현진이 전화해서 우리 집 와서 물 좀 떠달라고 해도 떠주기는 할 사람이다. 욕도 먹고 발길질도 먹긴 하겠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실제로 무슨 ‘동인지’인지 나발인지도 지가 인쇄해주지 않았나. 이 미친 새끼.
“친구가 뭔지 모르는 건 너지. 맨날 개새끼처럼 치댔잖아 니가.”
현진의 말은 민호에게 향했지만, 이내 자기 자신에게도 돌아왔다. 기실 황현진도 만만찮게 이상한 사람이었다. 친구 부모님 댁에가서 김장 돕는 일 같은 건 어지간한 사람은 안 한다. 전남친 집에 멋대로 찾아와서 살림살이 뒤지는 짓도 안 한다. 한 뼘보다 가까이 붙는 행동 역시 안 한다. 물론 그 씨발 ‘동인지’ 같은 걸 도와달라고 안 한다!
“황현진. 뭘 하고 싶은 거야. 니가 뭐? 우정을 잃기는 싫어? 하면서 먼저 지랄 떨었잖아.”
“야이, 니가 언젠간 여자랑 결혼은 해야겠다며. 그럼 거기서 내가 웅웅, 그럼 그전까진 나랑 즐기자, 하겠냐? 형은 병신이야?”
볼륨이 점점 높아졌다. 큰 소리가 터진 후엔 둘 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버텼다. 둘 중 누구 하나가 주먹 반 개만큼만 위로 손을 들어올려도 몸싸움이 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18살에 서로는 절대로 그런 개싸움 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둘 사이에 어떤 역경이오더라도.’
아. 그러니까 둘은 그런 게 문제였다. 그들은 지금 친구 노릇도, 애인 노릇도, 혹은 전 애인 노릇도 딱 정해서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뒤섞였고, 어떤 것은 갑자기 단절되었다.
“...이렇게 정신병자들처럼 살 바에는 결혼이 낫지.”
“내가 헤어져 보니까 알겠는데, 나 그거 때문에 정신병 왔어...이 짓 그만하면 안 돼?”
현진이 빌었다.
“나 오래 버텼잖아...”
민호도 딱 빌고 싶었다.
“누가 시킨 적 있어?...니가 먼저...”
민호가 말을 삼켰다.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뭔가를 눌러야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 멍청한 짓을 그만두고 웃음으로 넘기고 싶었다. 이러고 놀다가, 라면이나 끓여오라고 발로 차고 싶었다. 툴툴거리는 현진의 엉덩이를 한 번 꽉 쥐고 놀리고 싶다. 다음날에 또 만나서 시시덕거리기만 하고, 손은 안 잡고 싶다.
하지만 민호의 패착은, 갑자기 현진의 제안이 너무 솔깃하게 들렸다는 점이다.
“아까..., 책은.”
“잘 가져갔어. 이제 난 더 할 거 없어. 형도.”
현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순순히 대답은 해줬지만, 다른 화제로 돌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민호는 그의 눈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외에는 시야에서 다 날려버렸다. 실수로 입술이라도 바라보면 아, 상황도 이렇게 됐는데 그냥 키스하고 끝낼까? 하는 마음을 다잡기가 너무 어려울 것 같았다.
“그거 재미있더라. 결말은 몰라.”
“키스하고 끝나더라. 걔네가 절대 친구 하면 안 되는 사이라서.”
현진도 민호에게 온전히 집중했다. 결말은 지어냈다. 키스를 안 하는 건 아닌데, 그 뒤로 내용이 16페이지나 있거든. 현진의 머릿속엔 남아 있지 않은 내용이다.
바보같이 화가 치밀어 큰 소리를 냈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화는 잦아들고 현진에겐 슬픔이 밀려들었다. 벌써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꾹 참느라 목소리는 좀 가라앉았다. 그 슬픔을 간신히 밀어내면, 가슴이 빠듯해졌다. 눈알이 화끈거리는데, 이게 눈물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이민호가 황현진을 너무 또렷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아무 드라마나 영화처럼 격정적인 키스로 끝내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붙어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몇 번이나 생각한 현진만의 시나리오였다. 몇 번이고 폐기되었던.
“형 그냥 나랑 키스해.”
더 나은 방식이 있었을 텐데. 하지만 현진은, 자기가 되게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삼수했겠지, 하는 자책도 곁들였다. 그러니 멍청한 나는 시나리오라든지, 그럴듯한 그림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다. 제발, 이제 그냥, 나랑 키스나 했으면. 그 생각만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
민호는 현진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다시 눈을 토끼처럼 둥그렇게 떴다. 민호는 그가 계속 뭔가를 꿍얼거릴 것을 예상했다. 그러면 8개월 전에 진작 그런 말을 하지 그랬냐며 따지고, 화나서 어쩔 줄 모르는 척 그를 쫓아낼 생각이었다. 비밀번호 바꿀 거야, 무조건 길게. 밖에서 엉엉 울면 경찰 불러야지. 탄탄한 계획도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황현진이 키스 얘기를 해서 망했다.
민호는 알고 있었다. 키스 나도 하고 싶다. 황현진? 아직 좋아하고 있다. 이런 단순한 사실들을 뼈저리게 알았다.
황현진은 입술이 말랑하고, 섹스도 재미있게 해줬다. 장난으로 주무르면 말랑하기만 한 엉덩이가 섹스 중엔 바짝 힘이 들어가 탄탄해졌다. 근육 모양을 따라 푹 패이는 자국을 상상하며, 또 한 번 끌어안곤 했다. 그 때의 현진은 장난처럼 하는 위협에 쪼는 척도 안 했고, 당장이라도 이민호를 씹어먹을 것처럼 꽉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끝나고 나면 흐느적거리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벌떡 일어나 민호의 수발을 들었다. 그들 사이에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말 너무 순진해 보이겠지만, 그래서 민호도 현진과 영원히 갈 줄 알았다.
이제 조금씩 훌쩍거리려는 현진을 바라보다 민호가 말했다. 그의 우는 얼굴이 너무 잘생기고 바보 같아서 마음이 갔다. 그래서 한 번만 더 이 낙지볶음에게 순진해지기로 했다.
“졸업하려면 뭐든지 해야 한다며. 열심히 살 거라고.”
“키스하면, 킁...졸업 못 해?”
“어어, 뚝, 안 달래줘. 황현진, 야, 그런 게 아니라..., 니가...평범하게 살고 싶다며.”
황현진이 그렇게 말했다. 발목 맞추고 한참 재활하던 때에. 취미로 시작한 그림이 적성에 맞는다고 기뻐하고, 입시학원 등록 후엔 8주짜리 상담 프로그램도 받았다. 한참 대학에 다니면서도, 절대 한눈파는 일 없었다.
어느 날, 행복에 젖어 엉겨있던 침대 위에서, 황현진이 안으로 짓쳐들어오다 말고 민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워서 너무 좋다고 했다, 어디가? 손이? 현진이 고등학교 때 둘이 맞춘 조잡한 커플링을 바라보다 말했다. 결혼반지는 엄청 좋은 걸로 할 거야. 그러고는 자기가 좋은 직장과 가정을 꾸릴 거라는 포부를 밝혔다. 아기랑 강아지를 같이 키울 거라고 했다... 그래서 민호도 그렇게 말해준 게 아닌가? ‘나도 나중엔 선 봐서 결혼해야지.’. 그랬더니 지가 갑자기 급발진하며..., 어?
“......”
“......”
그제야, 민호의 설명을 최대한 차분하게 듣고 있던 현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구겨진 단팥빵 같은 얼굴로 한 자 한 자 씹어 말한다. 아니 씨바알...
“난...형이랑 결혼할 거였다고.”
...?
키스는 격정적이었다. 둘 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멍청하지만, 너도 머리 진짜 나쁘다. 반쯤은 쪽팔린 마음을 숨기려 불붙은 키스였다. 다행히 그 쪽팔림은 금방 사라졌다. 혀를 섞으며 침에 녹기라도 하는 것인지. 목이 탔고 몸은 불탔다. 열정에 사로잡혀 뒷목이 뻐근했다. 어깨는 바짝 긴장하고, 다리엔 힘이 풀렸다. 그래선지 중간에 낀 허리가 중심을 못 잡았다. 민호는 아까 겨우 일어났던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눌어붙었다. 그 위로는 현진이 달라붙었다.
현진이 걸치고 있던 노란 앞치마를 벗겨낼 새도 없었다. 바보 같은 꼴이었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키스할 때 으레 들리는 쪽쪽거리는 소리, 혹은 그것보다 더 짙고 더러운 소리가 한참 방에 가득 찼다.
옷 안으로 들어간 현진의 손이 끈덕지게 민호를 만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자제하기 위해, 반쯤 기계적인 애무를 시도했다.
“...아...”
뭔가 말하려고 했다가, 그만두고 다시 입 맞췄다. 부드럽게 말려 들어간 혀가 어색했다. 더듬는 손이 점점 거침없어지며, 방해되는 옷은 한 꺼풀씩 흩어졌다. 차분하게 벗길 정신은 아니라, 엉망으로 들춰져 구겨진 옷이 자꾸 자세를 불편하게 했다. 할 수만있다면 찢어버리고 싶었다.
민호의 속눈썹이 촉촉해졌다. 눈을 감으면 그 속눈썹은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눈을 뜨면 커튼 연 창처럼 빛이 비쳤다. 깜빡거리는 빛에 현진의 속이 수런거렸다. 촉촉한 눈가에 현진이 입술을 꾹 눌렀다. 그 행동이 어쩐지... 자기가 생각해도 좀 로맨틱한 것같았는데, 사실 민호는 그러고 앉은 그를 그냥 바보라고만 생각했다. 그의 눈에는 현진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너무 잘 보였다.
“이러면 이제 친구 못 해...알지.”
민호가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말했다. 속에 없는 말로 부끄러움을 잊어보려는 시도였다. 현진은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민호의 코끝에도 한 번 뽀뽀했다. 언제 우리가 친구였다고. 현진이 속으로 코웃음쳤다.
생각해보니 둘은 정말로 친구 같았던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무슨, 문화센터에서 처음 만날 때부터, 둘은 서로에게 특별했을지도.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가 오늘부터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이 ‘뽀뽀’는 둘이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랑도 비슷했다. 코끝에 쪽. 길 가다 시비 걸린 중학생이던 현진을 그가 처음 구해줬을때, 뒷골목에서 처음 했었지. 한참 서로를 바라보다 입술에도 한 번 쪽. 그때 그들은 서로가 알고 있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로맨스 소설, 영화, 드라마를 떠올렸다. 앞으로도 그렇게 아름다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둘 사이에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형, 내가 생각해보니까 그거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야. 추워...”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무슨 역경이 그렇게 많겠어.”
뭐라고 지껄이든간에 무시하고 민호가 칭얼거렸다. 현진이 바지를 벗겨내고 있었다. 그래도 현진의 말을 들어주는 기색이었다. 적어도 현진은 그렇게 믿고 주절거렸다. 어쨌건 이민호가 허리를 들어줬으니 그것만으로 족하기도 하다. 현진이 계속 말했다. 울음기 섞인 코맹맹이 호흡이 진지해진다.
“그냥 평범하게, 오래오래 같이 살자.”
“...흥...”
민호가 손을 들어 현진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악. 현진이 작게 아픈 소릴 냈다. 아직도 눈물이나 줄줄 흘리고 있는 주제에 멋진 대사를 치네. 안 멋있고 바보 같다는데도, 계속 그렇게.
민호가 또 생각했다. 만약 우리의 이야기가 드라마나 영화, 심지어는 뭐, ‘동인지’ 같은 거라면, 사실 이 결말은 너무 별로다. 알아 온 세월을 다 합치면 몇 개 정도는 극적인 사연이 있겠지만, 짧은 기승전결로 담기에는 확실히 너무 평범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그저 허송세월한 오해 기간도 웃기는데, 이제 보니 그 화해도 너무 단순하고 허탈했다.
민호가 현진의 앞치마를 우악스럽게 빼주며, 머리카락을 벅벅 쓰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눈물로 엉망이 된, 그만의 울보 낙지녀석에게.
“빨리...하기나 해.”
민호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황현진이나 이민호나, 별로 똑똑하진 않은 것 같으니까, 당연히 그도 단순한 게 좋았다.
작품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니 평범하게 오래오래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