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 YOUR DARLINGS


한 말씀만 하소서

키리사메

올림. 월로전月老展에서.

 

서기 158년, 서라벌의 한 장수는 전쟁통에 전사한 후 염라대왕이 아닌 월로에게 가게 되었다.

 

월로는 사람 간의 연을 맺어준다는 명계의 인물로, 남녀 간의 정이 통하지 못하고 한을 품게 된 생명들을 염라보다 먼저 만나 한을 들어주는 일을 하였다.

 

그리하여 월로는 명계로 올라온 이 장수에게도 말하길,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

 

방금 연인과 사별하고 목숨도 잃은 장수는 월로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만 내전을 가득 채운 물 위에 가만히 무릎 꿇고 앉아 있었으니, 월로가 재차 말했다.

 

‘억울하게 사별하였다고 들었다.’

‘…….’

‘그래서 내 너의 원을 하나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

‘사별한 이들이라면 사내계집 할 것 없이 이곳에서 하소연을 하곤 하니 내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가능하다.’

‘…….’

‘작은 마을의 신이 되는 것도 좋고, 고국에 한동안 비를 내리게 해줄 수도 있다. 이다음 생에서 무한한 부를 축적할 수도 있겠지.’

 

장수는 덤덤히 월로의 말을 들었다. 그 중 자신이 바라는 소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내여도 괜찮습니까?’

‘뭐라고?’

‘저도 사내고 그 아이도 사내입니다. 당신은 남녀의 정을 사후에 이어준다는데, 남자와 남자여도 징벌 받지 아니하고 상을 내려주시냐 아뢰는 것입니다.’

 

월로는 장수의 말에 다시 옷소매 안의 명부를 열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장수 이호. 아달라 5년, 서라벌의 한산하漢山河 거점지에서 사내와 내통하여 아달라 왕에 의해 유명을 달리하다. 사내도 같은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다.

 

월로는 서라벌의 왕이 한산하 유역으로의 진출을 욕심내어 한동안 많은 이들이 명계로 올라왔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들의 명부 가운데 이 자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왔었다.

 

명부에는 불명확한 죽음이 있을 수 없도록 사인이 반드시 기재되어 있고, 살해 당했을 경우 그 살인자의 이름도 같이 올라오게 되어 있었다. 연인보단 살인자에 가까우니 염라전에 가 대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데, 어쩐 일로 월로전에 오게 되었을까.

 

거기까지 떠올린 월로는 지체 없이 다시 물었다.

 

‘소원이 무엇이냐 물었다.’

‘그 자를 살려주십시오. 제가 아니라 그 자의 소원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 자의 소원이 다시 살아가는 것이라더냐?’

‘…….’

‘아니면 그저 네가 만나고 싶은 것이냐?’

‘제가 그 자를 죽게 했으므로 되살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미 명계로 온 목숨을 다시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곳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갈 수는 있어도….’

‘그게 아니라면 저는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신이 되기도, 영웅이나 양반이 되기도 싫다니 네놈은 인간이 아니로구나.’

 

신도 아니면서 그리 많은 인간을 죽였으니 권위에 도전한 것에는 변함이 없도다.

 

하지만 월로전의 법도상 이 아이의 한풀이 역시 수행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시각, 염라전에서 헤매며 간소한 벌을 수행하고 있던 그의 연인이 호출을 받게 되었다.

 

생전의 불명예를 고스란히 안은 채 하늘에서 뚝 밀려 떨어졌다고 한다.

 

‘아이야. 스스로 구제해 보거라.’

‘…….’

‘그 아이 역시 지상으로 돌려보낼테니.’

 

한마디로 황현진은, 가만히 있다가 꽁으로 환생하게 되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소속 없는 채로 사회에 방생되려니 슬슬 위기감이 찾아 든다.

 

[ 현진아 졸업 축하해! ]

[ 언제 한 번 밥 같이 먹자 ]

 

입출금 저축예금

신한 110-548-756525

47,728원

 

“돈은 어떻게 이렇게 매일매일 없냐…”

 

당연하다. 주제도 모르고 최악의 거지행 급행열차 미대를 택했으니. 어차피 기술 배우지 않는 이상 다른 문과생도 사정 어렵다지만 현진은 그 중에서도 순수미술, 개중에서도 화가를 하고 싶어하는 진성이었다. 최근에는 누구한테 발견이라도 당하고자 인스타를 시작했다. 아직도 피드를 어떻게 꾸며야 먹힐지 전혀 감이 안 왔다.

 

학교 다니면서 알바 두세개씩 해서 바짝바짝 벌어도 등록금 재료비 월세 이것저것 내고 나면 수중에는 딱 햄버거 빠듯하게 사먹을 돈, 휴지 살 돈 하나 남았다. 졸업 앞두고 다른 애들은 졸업여행 얘기하고 벌써 유럽 다녀 오던데. 현진은 당장 취업할 때까지 알바 늘릴 생각이나 해야 한다. 으아아. 잔고를 보고 매트리스를 한참 뒹굴거리다 다시 엎드려 직방을 켰다. 주제에도 안 맞는 가격의 골방들이 쭈루룩 쏟아진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기대와 포부를 안은 새로운 인간들이 밀려들어오는 이놈의 학교 근처에 그냥 계속 고여 있을지, 다른 동네로 거취를 옮길지 고민이었다. 어차피 혼자 사는 마당에 옛날 과제나 짐 같은 건 다 버리고 더 싼 집 구하는 것도 방법이다. 반지하… 곧죽어도 반지하는 싫다. 스스로를 공간에 잡아먹히도록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오세 적 엄마아빠와 일찍 빠이빠이 하고 거둬 길러주셨던 할머니 돌아가시고 남겨진 통장으로 우선 스스로를 반층 아래의 지하세계에서 구제하는 것부터 선택했다.

 

“하…….”

 

아침 집에 있는 걸로 뚝딱뚝딱 만들어 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고파. 일생 얼굴로 먹 고 산다는 얘기 들으면 뭐해. 그 말마따나 결제할 때 페이스 아이디로 다 되면 좋겠다. 이럴 때 꼭 안 먹던 피자가 먹고 싶다. 이불 밑에 깔려 있던 휴대폰에서 우웅 진동이 울렸다. 고모였다. 이름을 확인한 현진이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송금보내요

황연화님이 200,000원을 보냈어요.

 

[ 현진아 잘 지내니? ]

[ 고모야~ 오랜만이다]

[ 졸업한다고 해서 용돈 좀 보내니 맛있는 거 사먹고

 고모부 재판 끝나면 같이 밥이나 한 번 먹자. ]

 

…고모 돈 받기 싫은데. 하지만 이십만 원의 유혹 참기 힘들다. 풀타임 알바 이틀치. 족저근막염과 교환해야 가능한 돈이다.

 

고모부 똑 닮아 하는 짓도 유전인 황연화의 의도야 뻔했다. 할머니 사망보험금이 고스란히 현진에게 갔던 걸 알고 있을 테고 그걸 승냥이처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고모라면 현진도 노려 보험금을 더블로 챙길지도 모른다. 무서우니까 올해는 진짜 고모랑 손절해야지. 고모부는 부동산 투기하면서 매번 사고를 쳐서 재판 중 아니면 징역 2년 3년씩 사는 중이었다. 중학생 때 할머니네 가게에서 대판 싸우고 나간 이후론 본 적이 없다. 고모도 얼마나 익숙한지 모든 약속 잡는 기준을 재판 끝나면, 으로 말했다. 근데 그 재판이란 게 인생만큼 길어질 수도 있는 건데. 자신에게 늘 우선순위의 일이 있다고 도피처를 마련해놓기 위함인 것 같았다. 둘이 여기저기 피해 입히고 다니는 걸로 치면 지옥에 가서도 또 지옥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와중에 우웅 진동이 울렸다. 메일 알림이었다.

 

황현진 님,

아쉽지만 이번 저희 E&E 공개채용에서 함께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좋은 날들만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생명을 서서히 죽게 하는 게 하나씩 있다. 식물에겐 그게 가뭄일 테고, 사람에겐 그로부터 비롯되는 기근일 테고, 새들에게는 대기오염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연속되는 불합격 역시 그 고리일 테고. 현진은 스스로 그 ‘서서히’의 사유를 외로움일 거라고 생각했다. 돈이 아니다. 돈도 돈이지만 여기저기서 잊혀지고 버려지고 심지어는 뭣도 없는 저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통해 얻는 외로움은 단순히 돈 없는 것과 견줄 수도 없다. 늙고 병들거나 외로워 내 존재의 확실성이 사라지면 죽음을 맞이하는 게 동물들의 습성이기도 하다.

 

인생 폭망하기 직전에 로또 1등 당첨 소식을 듣고 인생 역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놀란다. 사람‘들’씩이나 될 정도로 그런 일이 많단 말이야? 세상 공평한 거 맞아? 하지만 늘 벼락이나 돈벼락이나 생명을 잃게 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돈벼락 맞고 싶어 하는 고모만 봐도 알 수 있다. 욕심은 제 명 재촉하는 법이다.

 

마음 속 어디에 있으면서 아직도 정의하기 힘든 이상한 무력감이 겁날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 때마다 현진은 일단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부터 했다. 누워 있으면 뭐하냐. 나가서 노상이나 까자.

 

나가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쟤는 얼굴로 먹고 살 수도 있겠는데 생각하는 인물 중 한 명이 지나가던 기획사 사장이라 명함 내밀어서 내일 당장 연예인 스케줄 뛰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누가 내 인스타 보고 그림을 천만 원에 사갈 수도 있는 거고. 지금은 해시태그 타고 들어와서 아무거나 다 누르는 홍보계정들의 좋아요 열두 개가 전부지만. 현진은 혼자 남았지만 존재를 확고히 하기 위해 분투했다.

 

후드 뒤집어 쓰고 지갑을 챙겨 촐랑촐랑 밖으로 나갔다. 입춘이 뜬금없이 2월에 있는 까닭도 날이 난데없이 포근해지기 때문인가보다. 대학들은 왜 다 산에 있는 걸까? 언덕배기를 내려가며 위성 하나 콕 떠 있는 꺼먼 하늘을 보며 저 너머엔 뭐가 있을까 이렇게 아틀란티스 소녀가 탄생했겠지… 같은 생각이나 하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사장의 껄렁한 인사에 꾸벅 인사하고 후레쉬 하나. 깔라만시 하나. 진라면 하나 골라 계산했다. 낮동안 해가 떠 지면을 데워놓은 덕에 노상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봉투 필요해요?”

“아뇨, 여기서 마시고 갈 거예요.”

 

학교 다니는 내내 봤던 사장님은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진짜 잘생겼다. 놈팽이 같은데 태도가 묘하게 여유로워서 그런지, 또 젊어서 그런지 건물주 아들이라는 소문도 있다. 학교 애들이랑도 다 친해서 저 사람이랑 같이 술 마시는 애들도 있었다. 현진은 낯가려서 그렇게까진 안 됐다.

 

“넌 무슨 맨날 혼자 그렇게 술을 마셔. 혼술이 알콜중독의 지름길이야.”

“하.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저 집에서는 안 마셔요.”

 

계산해주던 사장님이 젓가락을 컵라면 위에 탁 올려놓으며 말했다.

 

“만취해서 진상부리면 출입금지 시킨다.”

“사장님 없을 때 들어오면 되죠.”

“직원 다 잘랐어. 요즘 장사 안 돼서.”

 

어어 이렇게 치트키를? 장사 안 된다는 얘길 들으니 측은지심이 들었다. 내리깐 얼굴을 측은하게 보는데 사장이 갑자기 커다란 눈을 똑바로 뜨고 현진을 쳐다봤다. 아 깜짝이야. 어. 누구 닮았다.

 

“사장님.”

“왜?”

“저 왜 이렇게 사장님 익숙하죠?”

“작업 거냐? 빨리 혼술하러 가. 심심한데 진상 어떻게 부리나 구경이나 하게.”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뭐가.”

“그 리모인가 아이돌 닮았어요.”

“칭찬이야?”

“근데 리모가 더 잘생긴듯… 저 빨대 하나 가져가도 돼요?”

 

잔소리 듣기 전에 얼른 답도 안 듣고 빨대를 뽑아 휙 라면물 부으러 떠났다. 근데 진짜로 많이 본 것 같은데. 내가 착각했나…

 

 

 

 

 

*

 

 

 

 

 

 

월로전은 뼛속까지 금방 타들어갈 것 같은 화염 대신 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정신이 들었느냐?’

 

월로가 없을 때 군사들의 함성만 가득 들리던 월로전 뒷방에서 수행하듯 한동안을 지낸 장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왜 이곳에 날 처넣은 거냐고 따질 줄 알았는데 장수는 가만히 월로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월로전은 온갖 곳이 다 시꺼먼 명계에서도 드물게 투명하고 밝은 공간이었다. 내려받을 것이 상이냐 벌이냐 시시비비 가릴 곳이라기엔 영 평화로워 죽은 것도 깜박 잊을 것 같았다.

 

‘소원을 이루어 보니 어떠느냐.’

‘소원을 이루었다?’

 

월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리지? 그 아이를 되살렸다는 건가?

 

월로가 손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물에 무언가가 먹물 퍼지듯 그려지며 비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안개처럼 부유하던 인영이 곧 윤곽을 만들어냈다. 남자 한 명이었다. 뒤돌아있던 남자가 장수의 쪽을 바라본다. 어딘가 긴장된 눈빛이 영락없이 그 애였다. 눈동자가 묘하게 이 쪽을 비껴가 있어 저를 보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현진아.’

 

장수는 수면으로 손을 뻗었다. 첨벙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눈에서만 파동이 일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정적이 흐르는데 주변 어느 곳에서도 소리가 들리지 않아 감각이 오로지 저 신과의 대화를 위해서만 남았다는 걸 알았다. 언제 다시 태어난 거지. 그리고 다시 태어난 현진은 이미 장성했으니 그 방에서 십수 년을 보낸 것이었다.

 

그제야 민호는 애초에 신의 의도를 묻는 것을 잊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방금 죽은 영혼은 자신이 남겨두고 온 업보에 사로잡혀 신의 의도 따위는 알 리가 없었고, 알 바도 아니었고, 알아챌 수도 없었다. 죽은 연인을 되살려주겠다는 약속은 남은 게 한 뿐이라 성불도 할 수 없게 된 장수에게 적멸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떠돌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그는 연인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인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곳은 어디입니까.’

‘지상에 이런 곳은 없으니 천상일 테고 외로운 곳에 젊은 이가 올 리 없으니 나는 노인이다.’

 

말장난할 겨를이 있는 곳이구나. 신이 중생을 두고 노름질하기 딱 좋은 곳이다. 현진의 모습이 수면에서 사라졌다. 물 속의 눈동자와 마주 보며 볼 수 없는 곳까지 보려다 이내 떨치고 고개를 들었다.

 

‘지켜보고 싶다면 다시 지상으로 내려가거라.’

‘…….’

‘그리 구해보고 싶다면 말이다.’

 

이것은 상이 아닌 벌이구나. 저 자는 소원을 들어주는 자가 아닌 심판하는 자구나. 장수는 그제야 알았다.

 

지상으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건가. 사위가 물길이라 저 노인의 허락 없이는 영영 이곳에 갇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평선만 가득하다면 오히려 지금 명계의 끝은 제가 앉은 자리일 것이다. 앞에 있는 이가 어쨌건 장수의 관심은 아직 오롯이 지상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도 곧 하늘에서 뚝 떨어지게 되었다.

 

 

 

 

 

*

 

 

 

 

 

 

“깼어?”

 

헉. 현진은 말그대로 헉소리 내면서 깼다. 대단히 소리친 것도 아닌데 깼어 한 마디에 곧장 정신이 들었다. 

 

“헉.”

“헉은.”

 

정오가 다 된 건지 햇빛이 거의 저를 훈제로 만들고 있었다. 아직 겨울인데 땀까지 흠뻑 흘리는 중이었다. 베란다로 연결되는 통창으로 볕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건물주 아들이라더니 진짠가봐… 집이 혼자 산다기엔 심하게 컸다.

 

누워 있는 자세가 이상해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발 아래 베개가 있고 머리 뒤에 곧장 바닥이 있다. 생판 남의 집에서 잔 것도 어처구니 없는데 거꾸로 돌아서 잤다. 눈 앞에 웬 짱짱한 다리 두 개가 떡 버티고 서 있다. 근데 이 사람 아래에서 봐도 잘생겼다 신기하네…

 

“죽었는데 눈까리만 뜬 건가.“

 

나 분명 어제 깔라만시 후레쉬에 타서 자작하고 있었는데. 왜 이 사람이랑 밤을 지새운 거지. 이 정도면 물구나무 서기 해서 집에 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신머리다. 사장이 무단침입으로 고소하면 변호사 선임 비용 얼마나 드는지 갑자기 생각이 비약했다. 알뜰살뜰 인생의 증상이다.

 

“저………”

“응.“

“다리 좀 치워주세요….”

 

민망해요… 하. 남자가 짧게 웃었다. 이미 방 크기부터가 혼자 사는 집이 아닌데. 설마 얌전하게 부모님께 인사까지 드리고 들어와서… 아니면 부부 방에서 신세를 졌나.

 

“집 요 근처일 거 뻔한데 주소를 모르니까 답답하더라. 비상연락망도 없어 얼굴 퉁퉁 불어서 핸드폰도 안 열려 민증 주소는 옛날 거고.”

“죄송합니다….”

“잘 잔 것 같으니 됐어. 깼으니까 이제 청소기 좀 돌릴게. 해장은 안 해도 돼?”

“…….”

“어이 황현진씨.”

 

멍 때리는데 이름을 불러서 퍼뜩 놀랐다.

 

“제 이름 어떻게 아세요…?”

“무슨 소리야. 어제 나랑 통성명하고 다 했잖아.”

“다, 다요?”

 

뭘 다? 현진에게 청소기 돌린다고 한 게 괜한 말은 아닌듯 부와앙 다시 무선청소기가 돌아갔다. 이미 깨끗해 보이는 바닥을 구석구석 훑어낸 남자가 주방에 우뚝 서서 아직도 누운 채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현진을 봤다. 학교 다닐 때도 몇 번 애들 집에 끌려가서 잔 적이 있어서 필름 끊기는 게 문제긴 했지만 소주 좀 마셨다고 일면식만 있는 남자 집에서 숙박을.

 

“밥이나 먹고 가. 속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밥…도 괜찮아요.”

“순대국 먹지?”

“어 네. 근데 순대만요.”

 

휴대폰을 뒤지던 남자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우와 전화로 배달 주문하는 사람 진짜 오랜만에 본다. 예 사장님 여기 현대맨션 3동 204호인데요. 순대국 두 개 하나는 내장만 하나는 순대만.

 

“어떡하죠 사장님 저 진짜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너랑 나랑 사고를 쳤어 뭘 했어.”

“이상한 말 안 했죠? 진짜죠?”

“그러니까 기억이 없을 때까지 왜 마셔. 그런 줄 알았으면 나도 처음부터 돌려보냈지.”

 

사장의 핀잔이 맞는 말이라 현진은 공손해졌다.

 

“뭐 누구 교수님 욕하는 것 같던데. 졸업하기 싫다고 엉엉 울고. 전여자친구인가? 효진이 이름도 부르고. 그러게 평소에 좀 풀고 살아.”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가서 이거 쓰레기 좀.”

“에?”

 

내밀어지는 재활용 더미에 현진이 순수하게 의아함을 담아 쳐다보자 남자가 풉 웃었다. 이걸 왜 나한테 시켜. 가 아니라 이런 일이 주어질 거라고 상상을 못하고 살아온 왕자 행색이다. 현진의 태도에 남자는 왠지 안심이 됐다. 남들 다 하고 사는 거라지만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해댔으면 슬플 뻔했다. 손에 물 안 묻히고 사는 게 워낙 잘 어울린다.

 

“담배는 펴?”

“아뇨.”

 

아 그럼 내가 가면서 담배나 피고 와야겠다. 담배가 어딨더라 담배 담배 중얼거리던 남자는 패딩을 걸치고 전광속화로 일반 쓰레기까지 그러모아 현관으로 텅 나가버렸다. 움직이는 거 좀만 봤는데도 살림꾼인 걸 알겠다. 이상하게 허술해 요리든 청소든 나사 하나가 빠져 있는 현진과 몸짓부터 달랐다. 

 

남자가 밖에 있는 동안 국물만 떠서 뛰어온 듯 빨리 도착한 순대국을 흡입했다. 남자는 뚜껑 열자마자 그릇으로 달려드는 현진을 국물 식히면서 구경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순대 안에 터질 듯이 고기와 고명이 잘게 들어가 있어 감칠맛이 있었다. 거기다 청소하면서 환기시키느라 싸늘했던 찰나에 뜨거운 국물을 마시니 속이 한결 풀리는 기분이었다. 와구와구 먹고 있자니 남자가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건네며 현진이 먹는 걸 대놓고 구경했다. 흰자로 흘끗흘끗 얼굴을 살피는데 뭘 눈치를 봐. 하며 볼때기를 밀었다.

 

“아저씨.”

“왜.”

“잘생겼어요.”

”알아.”

”친구들도 아저씨 얘기 맨날 하던데. 후문 씨유 사장님 잘생겼다고.”

“알아.”

“우우…”

“뭐가 우우야. 밥이나 먹어. 며칠 굶긴 줄 알겠다.”

“요즘 입맛 없었거든요.”

“취업 때문에?”

 

네. 얼굴로 먹고 살면 되겠구만. 저 그 말 제일 싫어해요. 얼굴로 먹고 살기엔 좀 힘들 것 같으니까 정신 차리고 구직 열심히 해. 금방 정색하며 태도를 바꾼 남자에 현진이 물을 마시며 우글우글 웃었다. 대화를 계속 하다 보니 왜 합석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 남자가 만취 직전에 주변에 있는 온갖 사물에 시비를 거는 저를 보며 무슨 시덥잖은 소리 하면서 말 걸었을 테고, 취한 자신은 옳다꾸나 외롭기 싫어 받아들였을 거고.

 

“아저씨 뭐하는 사람이에요? 집 이렇게 좋은 거 보니까 편의점만 하시는 거 아닐 것 같은데.”

“맞춰봐.”

“…사채업자?”

“회개했으니까 그 얘기 꺼내지 마.”

“헐…”

“이것저것 해. 근데 언제 봤다고 아저씨야.”

“보통 언제 본 적 없는 사람을 아저씨라고 하지 않나?”

“말대답 잘한다 너.”

“그냥 좀 시비 걸고 싶게 생겼어요.”

 

그러시든지. 다 먹었어? 물어본 남자가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나 그릇을 옮겼다. 현진이 손을 뻗자 씁, 강아지한테나 할 법한 소리를 내며 가만히 있으랬지만 무전취식하는 건 도리가 아니니까. 숟가락 젓가락 옮기면서 보는데 양 팔 꽉 차는 아일랜드 서랍 안에 웬 가재도구들이 잔뜩 있었다. 요리사 아니야? 취미로 편의점 하고. 주방에 가까이 서자 남자의 가까이서 담배 향이 종이 타는 냄새처럼 옅게 나서 저도 모르게 킁킁댔다.

 

“뭐해?”

“아, 냄새 신기해서.”

 

원래 담배 냄새가 이렇게 은은하게 향기롭게 나나? 들어오기 전에 복도에서 국민체조 하며 향을 날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건 알 리 없었다. 잘생긴 사람은 담배 냄새도 피부에서 리뉴얼되나 싶었다.

 

“할 거 없으면 영화 보러 갈래?”

“할 일 많거든요?”

“뭐.”

“빨래….”

“아바타 새로 나왔던데 보러 가자.”

“옛날에 그 아바타요? 새로 나왔어요?”

“너… 산에서 수련하다 내려왔어?”

 

아까는 전화로 주문하더니 이번에는 사파리에 들어가 영화표를 뒤지는 남자를 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햇살 좋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라 앉은 채로 몸을 흔들며 바깥 구경하자니 왠지 평화로웠다. 어제는 아주 멀리서 서울의 밤을 내려다 봤는데 오늘은 처음 보는 나무를 근경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묘하다 못해 세상이 작게 충돌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햇살을 접시처럼 잎사귀에 담은 나무가 흔들리는 걸 바라보던 현진에게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 누가 소리치는 소리가…

 

“아저씨.”

“어.”

“어제 저한테 뭐라고 하셨어요?”

“뭐?”

“뭐… 뭐라고 소리질렀던 것 같은데.”

 

그게 왜 갑자기 해를 보다 생각나는 거지? 저 아저씨가 나를 잡고 막 뭐라고 뭐라고 했는데… 한 마디도 기억이 안 나. 필름이 끊겼다가 돌아오는 게 보통 정신을 각성시킬 만 한 일이 있을 때부터인데. 그러면 그걸 기점으로 생각이 나야 하는데 왜 딱 그것만 기억 나지.

 

“있다. 오후 두 시. 용산 괜찮아?”

“맘대루요.”

 

이 아저씨야말로 할 일 없는 거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직원 아저씨밖에 없다면서요. 안 가도 돼요?”

“있지 당연히. 그걸 믿니?”

“진짜 개짜증난다.”

 

토요일 대낮에 무슨 재주로 아바타 포디엑스를 예약한 건진 몰라도 처음 술먹은 사이에 같이 쿨쿨 자고 순대국 먹고 영화 보고 아주 커플 스케줄을 다 하게 됐다. 어제 집에서 나오며 대충 입은 인생의 쓴맛, 아픔, 고배룩을 그대로 입고 다니자니 민망쓰였으나 택시 타고 한남대교를 지날 땐 날이 너무 청명하고 라디오에서 잔잔한 발라드가 나와서 좋았다.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것이.

 

아이파크몰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역사와 온갖 건물들을 다 이어놔서 어디로 가야 뭐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현진은 이런 미로 같은 곳에 오면 항상 길을 잃었는데 다행히 남자가 여러 번 와본 듯 길을 수월하게 찾아 갔다. 인파를 헤매며 영화관으로 들어가 꽉찬 포디엑스관에서 영화를 보고, 일식한식 섞인 이상한 덮밥집에서 마주앉아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남자가 갑자기 양말 사야 된다고 해서 한참 다시 내려가 유니클로를 구경했다.

 

현진이 문득 책 사고 싶다고 졸라 영풍문고에서 부동산 주식 서적을 한참 지나 미술 코너를 구경하고 이상한 팬시들을 가지고 장난 치고 나니 여덟 시가 다 됐다. 불쌍해 보여서 일부러 이렇게 놀아주나 싶을 정도로 남자는 현진과 시간을 썼다. 편의점 말고는 다른 일은 안 하는 건가. 그래도 잠깐 현실을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래서 밖에 나가고 사람을 만나야 된다는 건지. 공차를 사 하나씩 들고 타피오카를 빨대 끝으로 집중공략하고 있는 현진에게 남자가 말했다.

 

“어이 없다. 너랑 하루종일 있었던 게.”

“사장님 솔직히 백수 맞죠.”

“아니지. 씨유 일은 일도 아니냐?”

“음… 그건 그런데. 알바 하면 보통 백수라고 하잖아요. 저처럼.”

 

하. 또 슬퍼. 백수인 것보다 수입이 불안정하다는 게 더 마음을 잡아뜯었다.

 

“너도 곧 아니게 될 텐데 뭐. 걱정하지마.”

 

그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메일 알림이었다. 문자 전화 아닌 메일 알림은 보통 채용 결과인 경우가 많다 보니 현진은 옆에서 남자가 뭐라고 떠들건 잔뜩 긴장한 채로 휴대폰을 열었다.

 

“헉.”

“왜.”

“…….”

“뭔데.”

 

POD갤러리 채용담당자입니다, 로 시작한 메일이었다.

 

“…저 붙었어요.”

 

저희와 함께하게 된 황현진님 환영하며 8일 뒤 월요일에 출근하라는 간략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가 잘못 보나. POD갤러리는 현진이 지원한 곳 중에서도 가장 지원률이 높은 곳 중 하나였다. 삼청동 갤러리들 가운데 규모로도 전시 퀄리티로도 상위권이라 사설 갤러리 가운데 1지망인 곳이었고, 면접을 보고 나서도 한 달 가량 연락이 없어 당연히 떨어졌겠거니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POD갤러리….”

“축하 파티 해야겠네.”

 

남자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담담히 말하며 선물이라도 사줄까? 하곤 현진이 거절할 새도 없이 자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더니 행거를 쭉쭉 훑으며 거침없이 출근룩으로 입을 법한 캐주얼 의류들을 무더기로 쇼핑백에 쌓아 올렸다. 이것도 잘 어울릴 것 같고 저것도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칠만원짜리 셔츠들을 턱턱 올려놓는데 현진은 이 아저씨가 진짜 미쳤나 싶었다. 극구 말리고 말려 반으로 줄였다. 백만원짜리 하나 사는 것보다 일단은 이런 잔챙이가 여러 장 있는 게 좋지 않냐고 한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취업의 기쁨도 기쁨이고 양손에 가득 들린 쇼핑백도 현실성이 없었다. 발로 걷는지 손으로 걷는지 쇼핑백 타고 가는 건지 분간이 안 된다. 토요일에도 합격 여부를 알려주기도 하는구나. 갤러리라 업무 요일이 불규칙한가.

 

“좋다…….”

“…옷 산 게?”

“예에….”

 

택시에 올라타서도 계속 멍때렸다. 현실성 없는 하루다. 어제 필름이 끊긴 채로 지금 꿈을 꾸나?

 

옆에서 남자의 시선이 느껴져도 아랑곳않고 현진은 풍경을 감상했다. 그 때 우웅 문자 진동이 울렸다. 고모에게서 온 것이었다.

 

[ 현진아 ]

[ 카톡 봤지? ]

[ 돈 안 쓰면 영준이 준다~ ]

[ 다음 주에 집 한 번 갈게 ]

 

이사라도 가야 되나. 어차피 이제 회사도 다닐 건데… 이제 고모는 안중에도 없고 첫 출근 전까지 뭘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일단 엄마아빠 할머니 산소부터 가고, 그 다음에 밀린 책도 좀 읽고 여유롭게 보내야겠다. 새 집 알아보고. 그래야겠다.

 

늦은 저녁의 강변북로는 막힘 없이 뚫려 있어 창문을 살짝 열고 바람을 맞으며 야경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지대가 낮게 있어서 그런지 하늘이 더 높고 강이 가까운 기분이었다. 하얀 파동이 조명처럼 빛나 보인다. 회사 처음 가면 뭐부터 해야 되냐는 현진의 말에 남자가 인사나 열심히 하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둘의 대화를 들은 택시 기사가 중간에 끼어 말을 걸어 왔다.

 

“손님 취업하셨나 보네요. 우리 애도 얼마 전에 임용고시 붙어가지고.”

“오,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그거 본다고 오 년인가 시간 많이 버렸어.”

“그 정도는 그냥 쉬는 셈 치고 하는 거죠. 더 길어지면 어때요. 붙은 게 대단한 거지.”

 

남자가 대꾸를 잘 해주자 택시 기사가 신나서 자식 교육 스토리를 한참 설파했다. 현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배경음악 삼아 잠잠한 한강을 오래고 바라봤다. 가로등 때문에 한 번씩 까만 유리창에 얼굴이 언뜻언뜻 비쳐 보였다. 이상하게 내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 존재를 오랜만에 인식하는 것 같다. 현진이 남자에게 조용히 말했다.

 

“사장님. 저 지금 현실성이 없어요.”

“붙어서?”

“네. 어제까지만 해도 왜 사는지 몰랐었는데.”

“뭐야. 너 어제 그런 소리는 안 하던데.”

“저도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한강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 무서우니까.”

“…….”

“죽으면 다음 생에도 그런 얼굴로 태어난다는 보장 없어.”

“그건 맞아요.”

“우우.”

 

풉 웃는 제 쪽으로 남자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현진도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봤다. 어둠 속에서 환한 눈동자. 아무리 봐도 처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편안하다. 단골집 사장님이라지만 그래봤자 대화가 몇 초 이상을 넘어갈 일이 없으니 초면에 가깝긴 했다. 낯을 가리는 현진이 이렇게 편안하게 맘 놓고 놀 정도면 저 남자의 사교성이 큰 몫을 했을 것 같았다. 친구 오랜만에 사귄 탓에 갑자기 신이 난 현진은 아까 옷 사주겠다던 남자처럼 급발진으로 제안했다.

 

“사장님. 다음에 저랑 또 놀러 가요.”

“너 친구 없구나.”

“아오.”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제 번호 모르시죠? 알려드릴게요.”

“적극적인데.”

“귀찮아도 제가 부르면 나와야 돼요. 알겠죠?”

“그래라. 근데 너 옷 사주니까 갑자기 또 사장님이라고 하네?”

 

현진이 손을 내밀어 핸드폰을 받고 제 번호를 찍었다. 저장하기를 누르고 이름을 적으려니 문득 남자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씨유 사장님이라고 저장하면 연락할 때마다 너무 이상할 것 같은데.

 

“사장님 이름이 뭐예요?”

“이민호.”

“오 잘생긴 이름.”

 

피식 바람 새며 웃는 소리가 났다. 카톡을 들어가 보니 친구 목록에 추가된 이름이 있었다. 이름 세 글자만 저장해놨더니 왠지 어색했다. 이민호. 프로필 사진이 시허얘서 뭔가 하고 눌러봤더니 명함이었다. 익숙한 글자들이 보이는.

 

“어…….”

 

POD 갤러리 관장

이민호

 

“저…….”

“아니 저저 미친놈이.”

 

깜짝 놀라 앞을 바라봤다. 기사 아저씨가 무언가를 보며 투덜대는 말이었다. 어 저 차는 왜… 반대로 달려오고 있지.

 

헤드라이트가 눈을 강하게 내리쫴 알았다. 아침에 해를 보며 왜 무언가가 자꾸 떠오르려 했는지를.

 

“…아. 큰일났네.”

 

남자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위험을 감지하긴 했으나 무언가 예견이라도 했던 것만 같다.

 

차가 택시의 정면으로 달려왔다.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은 탓에 현진은 그대로 옆 차선에서 달려오던 차와 충돌했다.

 

‘지금 죽으면 안 돼요.’

‘네?’

‘너 그렇게 죽으면 안 된다고.’

 

어제도 같은 사고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익숙한 헤드라이트의 습격. 편의점 안에서 달려나온 사장이 제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제 같이 앉아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나는 그에게 내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어제 크게 다쳤었다.

 

어쩌면 죽었다 살아난 걸지도 모른다.

 

 

 

 

 

 

*

 

 

 

 

 

 

‘어인 일이십니까?’

 

오랜만에 만난 현진은 피로해 보였다. 한산하에서의 생이별 이후 장장 이백 년 만의 해후였다. 기쁨을 감추지 못해 얼싸 안을 뻔했으나 현진이 수심이 깊어 그리하지 못했다. 현진은 어느 양반집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었고 성인식을 치르지 못해 성인도 아이도 아닌 상태였다. 현진을 마주해 신이 난 민호는 현진에게 한없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의 친부 황조식의 의형제고, 수학을 시켜줄 것이니 나와 함께 서원에 들어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현진이 일찍이 조실부모했던 상황을 모두 알며 한 말이었다. 섣부른 말과 행동이 나간 걸 알기라도 하는 듯 현진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엇이 말이냐.’

‘저의 친부는 의형제라는 분께 살해당하셨는데요…’

 

아뿔싸. 순간 회로가 멎었지만 나는 그 일을 모른다 잔치에서도 항상 네가 영특해 보여 잘 모르면서 거짓을 고했다 오해를 풀기 위해 갖은 수를 썼고 현진은 몇 달간 저를 설득한 민호를 따라 서원에도 입성했다. 하지만 민호가 현진에게 각별하다 한들 모두가 그렇지는 않은 법이었다. 노비 출신인 현진은 일반 자제들이 다니는 서원에서 적응하기를 어려워했고, 민호가 어째서 제게 이렇게 호의적인지에 대해서도 경계를 품고 있었다.

 

민호는 이 한 평생의 현진을 행복하게 해주고 적멸하면 그만인 것일 뿐인데, 이 아이는 왜 제 뜻을 이리도 몰라주는 것인지 마음이 상하여 마음 대로 하라 이르고 돌아섰다. 며칠 간 제 마음을 애써 달래고 다시 돌아간 현진의 주인집에 현진은 없었고 같이 종노릇을 하던 계집이 살그머니 나와 얼마 전 도망을 갔노라 말했다. 행방을 정녕 모르냐는 추궁에 계집은 그 아이가 제 부모의 산소가 있는 곳으로 떠나 정착하겠노라 전했다고 고했다. 이후 몇 달간 팔도를 떠돌다 어느 산자락의 절벽 아래 눈을 몸 위로 수북이 덮은 채 안식하고 있는 현진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민호는 한참 멀거니 서서 발 아래 풍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험준한 산세가 현진을 덮칠 것만 같아 얼른 중턱에 묻고 홀로 장례를 치렀다. 내가 살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생인가 벌인가.

 

한 번의 만남이 틀어지면 그 이후의 기회는 없는 것이 월로의 규칙이었던 듯했다. 그 아이를 다시 살려주십시오, 한 번의 행복한 삶을 만들어주기 위해 무수한 죽음을 경험시켜야 한다는 것을 현진이 다시 한 번 죽은 뒤에야 안 것이다. 이럴 거라면 지옥에서 만나는 것이 이로울 지도 몰랐다. 하지만 월로전으로 올라가 모두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을 이민호는 몰랐다.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현진은 태어났다. 처음에는 현진이 환생하는 주기를 알 수 없어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영혼이 한 번의 생을 살고 명계를 빙빙 돌아 꺼지고 되살아나는 시기는 불규칙했고 그런 주제에 괴로움은 항상 같았다. 현진이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났다는 건 알 수 없었지만 정처 없이 발 길 가는 대로 고개 넘고 강 건너는 여정을 백년 이백년 지새우다 보면 항상 어딘가에서 현진을 보거나 만나게 되었다. 기대함에도 현진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럼에도 현진을 다시 만날 때마다 기대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현진과 함께 지내는 시간도 조금씩 늘었다. 잠깐이라도 앞서 나가고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면 현진이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거리를 유지한 채로 지켜보기를 오래, 또 관계를 쌓아가기를 오랫동안 했다. 적어도 세 번째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민호의 눈에는 두번째 세번째 현진이 아니라 그 시절의 현진이 다른 생을 계속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장군이라 부르며 따르던 귀여운 아이가 그 모습 그대로 아주 영원토록.

 

영원이란 가득히 존재함과 동시에 허무와도 같았다. 현진은 민호가 안겨주고 싶은 만큼의 행복과 사랑을 느끼기도 전에 너무 빨리 소멸했다. 이 정도면 민호가 원하는 목표에 다가갈수록 그 찰나 월로가 훼방을 놓는 것은 아닌가 생각됐다.

 

각기 다른 현진의 첫 모습 가운덴 수학을 게을리 해 아버지에게 몰매를 맞는 장면도 있었고, 마음에도 없는 남의 집 밭일을 하느라 구슬땀을 흘리던 것도, 비가 추적추적 오는 저잣거리의 어느 판자 밑에서 동생과 보리빵 하나를 나눠 먹던 모습도, 처음으로 개통된 기차에 인파와 함께 올라타느라 선로 바깥으로 모자를 떨어뜨려 난감해하던 것도 있었다. 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현진은 늘 발견됐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어떻게 해도 현진은 갈피를 잃었고 사랑을 몰랐고 이민호를 몰랐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호를 만나면 길을 찾았고 사랑을 알았고 이민호를 궁금해했으며 자기 자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죽어갔다. 소원은 곧 철퇴가 되었고 이민호는 제 사랑과 함께 영원히 소멸할 수 없음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

 

 

 

 

 

 

[ 사장님 ]

[ 아니 관장님 ]

[ 이거 보러 가요 ]

[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Flag=1 ]

[ 모네ㅎ]

 

모네라니 취향 한 번 깜찍하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민호는 곧바로 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이거 티켓팅 피튀기는 건 알지?”

―헐….

 

그래 아바타 개봉하는지도 모른 애한테 뭘. 알겠다고 하려는 찰나 현진이 말했다.

 

―사실 알면서 보낸 거긴 한데.

“오. 자신 있어?”

―아뇽. 관장님이면 구할 수 있지 않아요?

“이자식이.”

 

구할 수 없어도 구해봐야지. 이번엔 현진과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기로 마음먹었던 터라 행성 따다 주는 거 아니면 식은 죽 먹기긴 하다.

 

첫 출근날, 현진은 바짝 긴장해서 여기저기 사슴눈을 뜨고 다니더니 민호만 보면 입술을 씰룩거렸다. 뭘 했다고 웃고 있어 쟤는. 관장과 홍보팀 신입이라 마주칠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담배를 피러 나가다 보면 현진이 어딜 우다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우다다 달려오고 그랬다. 저만 거의 일방적으로 봤다.

 

‘왜 숨기셨어요?!’

‘그냥. 말하는 것도 웃기잖아.’

 

하. 현진은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어서 긴장이 좀 덜한 것 같다며 쫑알쫑알 떠들었다. 보통은 더 어렵게 대하지 않나 싶었는데 워낙 단세포라 거기까지는 가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는 사람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다만 같이 저녁 먹고 싶어도 둘이 같이 근처에서 다니는 게 꺼려져 민호의 집으로 갔다. 얼떨결에 직장 동료 내지 데이트 상대가 된 것이다. 현진도 저를 그렇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3월 19일. 더 빨리는 못 땡기고.”

―헐 진짜예요?

“월요일이니까 반차 내.”

―넹!

 

현진이 멀리서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앞머리가 다 까져선 눈을 찌푸리고 있다. 코트며 안에 받쳐 입은 셔츠며 제가 사준 옷이라 마음이 흐뭇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오래 봤는데 이 정도 코디도 못하면 이천 년 헛산 거지.

 

“잘 어울리네. 잘 골랐지.”

“…어. 이거 사실 원래 있던 거예요.”

“뭐?”

“그 때 피팅 안 하고 입었더니 좀 작고 커서….”

“그럼 교환을 해야지.”

“택 다 뗐거든요….”

 

아니 얘는 아껴 살아야 한다는 애가 이렇게 덤벙거려. 우물쭈물 답한 현진이 당황했는지 관장님도 오늘 개멋지시네요! 이상한 화법으로 말했다. 미간을 찌푸린 민호를 이끌고 로비로 들어섰다.

 

현진은 표를 수령해 내려가는 동안 잔뜩 들떠 보였다. 수련을 좋아한다고 했다. 리얼리즘보다 추상화를 훨씬 좋아한다는 말에 수련이 추상화인가 리얼하지 않나… 말하자 물의 생김새보다 자신만의 표현이 더 많이 들어간 거라며 한참 침튀기며 설명을 했다. 민호는 사실 그림에 크게 감동을 받거나 뭘 느끼려고 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림을 보는 현진에게 집중했다. 가만히 집중하고 있는 얼굴이 평소보다 배로 단정해 낯설었다. 문득 현진을 이렇게 오래 가만히 바라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가늠이 도통 안될 정도로 오래 됐을 것이다.

 

태정태세문단세는 고사하고 이자춘이 응애가 되기도 전의 시절. 민호는 옛 서라벌의 장군이었고 현진은 아달라 왕이 고용한 연희자 패거리의 인물이었다. 

 

그가 충성한 왕조이자 주군이었던 서라벌의 8대 왕 아달라이사금은 이민호가 육위 장군을 하던 시절에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갖은 수를 쓰고 있었다. 아달라 왕의 외모가 독특하고 임금으로서의 권위가 부족한 탓에, 수교를 위해서, 전쟁을 위해서, 국격을 위해서 그 옆에도 준수한 장수가 보필해야 한다는 사조가 들었었다. 그해 전 왕조로부터 내리 이어진 백제와의 영토 분쟁에서 내리 울린 승전보의 일등공신으로 주목 받던 무관 민호는 굶주리는 병사들을 위해 어디선가 꿩을 산 채로 잡아와 조리해 병사들에게 지급하던 먹신 장군이기도 했다. 쌈박질도 다 먹으면서 해야 한다는 신조가 사기를 올리기에 충분했다. 고전하던 영토 분쟁에서 병사들의 생존률을 지극히 높인 그 기개에 감동한 아달라 왕이 그를 총애하며, 민호의 활약으로 서라벌은 한산하, 지금의 한강 유역으로 점차 진출하게 된다.

 

영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아달라 왕은 사기를 북돋기 위해 하루가 머다하고 벌판에서 연희를 벌였고 다른 장수들은 병사들이 다수 전사한 날에도 연희를 즐겼다. 민호는 그게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전술을 세우는 데 모든 걸 집중하던 시기였다. 연희에 참석한 날도 대부분 끌려간 것이지 제 발로 간 적은 없었다. 현진과 면을 트고 난 다음에는… 현진을 보기 위해 갔지만.

 

유난히 전투가 힘이 들고 팔에도 큰 부상을 입었던 날이다. 일찍 잠에 들려다 칼에 깊숙이 베인 왼팔의 통증이 극심해 처소에서 불을 켜놓고 홀로 술을 두어 잔 마시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처소에서 연희가 벌어지고 있어 밤에도 환하고 저잣거리처럼 시끌벅적했다. 나 여기 있노라 적군에게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짓들인지. 전쟁에 열심이긴 하나 사실 사람만 죽이다 보니, 왜 이곳에 왔는지 어느 방향이 원래 진출하려던 곳인지도 잊고 있던 민호였다. 이러다 불화살이 날아와 모두가 타죽어도 이제는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처소의 사방이 막혀 있는 것이 갑갑해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천을 걷고 나왔다. 그러다 처소 앞을 지나던 한 이와 마주치게 됐다. 차림새로 보나 군기라고는 코빼기도 없는 행동으로 보나 연희패의 인간이었다.

 

‘자, 장군.’

‘…….’

‘하, 하명하시면 받잡겠나이다.’

 

뭘 하명을 해. 황당했지만 민호는 일단 우뚝 섰다. 연희패가 왠지 거슬리던 찰나였다.

 

‘이름이 무엇이냐?’

‘현진이옵니다.’

‘하명을 하라고?’

‘예. 장군.’

‘저기 네 패거리에게 가서 조용히 좀 하라고 이르거라.’

 

현진이 아찔해져선 고개 숙인 채로 예? 되물었다. 그간 민호의 소문이야 무성했으므로 이 자가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 무관인지를 알아서였다. 명을 거절하면 아군의 목도 날린다던데. 목 뒷께가 서늘해 손이 떨렸다.

 

‘푸핫.’

‘……..’

‘미안하다. 장난 좀 쳐보았다.’

 

저를 슬쩍 올려다보는 표정이 장난을 칠 게 따로 있지. 그런 표정이라 민호는 더욱 웃었다.

 

‘너는 왜 연회에 가지 않은 것이냐?’

‘…오늘 연희에 서지 말라고 저희 꼭두쇠가…’

‘흠. 왜 그랬을까. 꼭두쇠를 때리기라도 하였느냐?’

‘아니, 아닙니다.’

‘심심한데 미적대지 말고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라니. 꼭 대감집 인간 같아 스스로 질타를 했다. 처소 뒤에 있는 언덕배기에서 유독 앞산 너머가 보이는 곳이 있었다. 본래는 혼자 오르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게 왠지 외롭던 찰나였다. 병사도 아닌 연희패의 사람이니 더욱이 신이 났다.

 

‘너는 어인 일로 연희패에 들어갔느냐?’

 

현진은 민호의 옆에 공손히 무릎 꿇고 앉았다가 혼이 나고 무릎을 끌어 안고 앉은 채였다. 흙바닥에 이미 한 번 댔던 무릎이 꾀죄죄해져 있었다.

 

‘꼭두쇠가 저희 형님이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오호. 네가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냐?’

‘처음에는 그러했는데… 지금은 즐겁습니다.’

‘꼭두쇠가 너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라면, 오늘 왜 빠지라고 한 것이냐?’

‘그게, 저를 서라벌로 돌려보내고 싶어 해서요.’

‘서라벌로?’

‘저희 같은 천민이 전하와 마마들 곁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더없이 성은을 입는 일이나, 전쟁을 따라야 하는 것이니 이쯤 돌아가라 일렀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예?’

 

용기 내 말하면서도 이 장난스러운 장군이 언제 돌변할지 몰라 조심스레 굴던 현진은 민호의 답에 당황해 되물었다.

 

‘나도 서라벌로 돌아가고 싶거든. 난리에 앞장선다고 하여 모두 충성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마 너희 형님과 나 말고도 그런 이가 숱할 것이다.’

 

이 사람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엄밀히 말하면 반역에 가까운 언사를 거침없이 내뱉는 장군에 현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장군을 똑바로 바라보는 불경을 저질렀다. 산너머를 보던 민호는 시선이 느껴져 현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아마 그 때쯤이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처음이거나. 현진을 그렇게 지그시 오래 본 것이.

 

“관장님 이거 봐요.”

 

고갱의 <센강 변의 크레인>이었다. 거대한 크레인이 설치된 센강 변의 풍경과 아이의 손을 잡고 강변을 걷는 어머니의 뒷모습.

 

“신기하지 않아요?”

“뭐가?”

“같은 물을 봐도 이렇게 다르게 표현한다는 게.”

 

왜 갑자기 독립영화 같은 말투로 말하냐. 그리고 수련은 연못이고 이건 강인데? 그렇게 놀리려다 현진의 표정이 문득 진지해 그만 뒀다.

 

“전시 와서 그림 많이 보니까, 왜 제가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미술을 하게 됐는지 알 것 같아요.”

 

세상에 진짜 많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다 생각하고 보는 게 다르다는 걸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이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문득 성찰을 하게 된 진지한 현진이 귀여워 민호는 숨죽여 미소지었다. 내가 본 황현진 가운데 가장 귀엽고 진지하다. 21세기라 그런가. 2000년대라 그런가. 딱 2000년생이라 그런가. 그동안 봐온 현진의 몇 번의 생에 걸쳐 늘 솔직하고 진지해 특별했지만 이번엔 특히나 더 당돌했다.

 

“솔직히 편의점 주인이 어떻게 미술관 관장인지 연결은 잘 안 되는데… 저는 이상하게 관장님이 저를 도와주려고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수호천사. 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눈치가 빠르다.

 

“저 살려주셨었잖아요.”

 

언덕에서의 밤소풍 이후로 민호는 연회에 자주 참석했다. 현진의 말을 들은 이후로 연희패의 공연을 마냥 철없는 놀이로 볼 수 없게 되자 더 구미가 당겼다. 그리고 제 옆에 무릎을 안고 앉아 있다 곧 다리가 아프다며 쭉 펴고, 나중에는 저를 따라 수풀에 드러눕기까지 했던 애가 재밌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예서 뭐 하는 짓이냐?’

 

어느날은 처소 바깥에서 소란이 일어났기에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현진이 병사들에게 무릎을 꿇린 채로 앉아 있었다. 저거 또 바지 흙범벅 되겠네.

 

‘무슨 일이냐?’

‘장군, 이 자가 처소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아는 아이긴 하다만. 현진아. 무슨 일이냐?’

‘그게, 장군께 드릴 것이 있어서요.’

 

현진이 품 안에서 작게 싸맨 보자기를 꺼내 들었다. 다들 의아하게 보는 와중에 현진이 그걸 한 꺼풀씩 펼쳐내자 그 안에 들어 있던 풀잎이 나왔다.

 

‘약초입니다. 장군께서 팔을 다치셨기에…’

‘구해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장군. 의원 아닌 자가 함부로 건네는 것을 약제로 쓸 순 없사옵니다.’

‘의원에게 가져가보면 될 것 아니냐? 부상자가 많아 이제 더 쓸 약도 없을 텐데. 약초가 맞으면 호재 아닌가.’

 

병사들이 꾸벅 경례하고 의원 쪽으로 향했다. 민호는 현진과 단둘이 남자 마자 웃음을 터뜨리고 현진을 일으켜 세웠다.

 

‘나를 이리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내게 죽어난 자들이 곡을 할 노릇이구나.’

‘……송구합니다.’

‘현진아.’

‘예, 장군.’

‘넌 정이 많은 아이로구나.’

‘……’

‘형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전쟁에 따라 나서고, 나와 얘기를 나눈 것 하나로 그리 걱정을 하니.’

 

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선택한 것입니다.’

‘뭐?’

‘…….’

‘…….’

 

일도, 약초를 구해오는 것도 정 때문이 아닌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말인 즉슨…

 

‘내가 너에게 소중해졌느냐.’

‘…….’

‘난 무예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눈치도 빠르단다.’

 

특히 사랑에 빠진 것은 기가 막히게 알아내지. 여인들이 나를 그렇게 흠모했으니까…

 

민호인지 현진의 고백 아닌 고백 이후로 전투는 어김없이 이어졌으나 밤이 깊으면 생존에 대한 표시로 현진을 처소에 몰래 들여 함께 시간을 보냈다. 숨죽여 얘기하고, 하룻밤을 보냈다. 현진은 발목을 다쳤다는 핑계를 대고 연희에서 매번 빠지게 되었고, 처소에 드나드는 현진을 누군가가 발견하기 시작하며 이 장군과 연희패의 아이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는 것 역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렴 어때. 나는 여전히 전장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고, 저 아이는 누구도 해하지 않을 존재인데.

 

현진은 민호에게 직접적으로 은애한다 말하지 않았으나 매일같이 알 수 있었다. 현진이 원체 진솔한 성정이긴 하여도 사랑은 원래 투명해야 하는 것이다. 듣지 못했을 때 눈으로도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명확한 선도 없는 영토를 언제까지고 넓힌다고 목적 없이 인민을 죽이던 민호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전쟁을 어서 끝내고 서라벌로 현진과 함께 돌아가는 것. 몰래 연희패를 나가 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갈 예정이었던 현진은 민호 때문인지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불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두려웠고,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워졌다. 이 변화를 누군가는 기민하게 알아채고 있었지만 이민호는 오로지 전투를 마치고 돌아가 현진을 두 눈으로 확인할 생각 뿐이었다.

 

현진을 사랑하게 될수록 이민호는 베고,

 

‘현진아.’

 

베고,

 

‘나와 같이 가자.’

 

열심히 벴다.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서라벌로.’

 

내 생전 사내와 정을 통하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 일생 무예에만 빠져 살 줄 알았던 스스로의 마음이 돌아선 것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한 사람과 살아가기 위해 모든 인간을 죽이게 되는 건 아닌지 노파심마저 들었지만 멈추는 방법은 지금이나 그 때나 알지 못했다. 걷잡을 수 있는 건 질주하는 자의 목숨 외에 무엇도 없었다.

 

‘이 장군은 요새 많이 분주하신가 보오.’

 

아달라 왕이 독대하기를 원해 왕의 처소를 들렀다. 아마 밤에 현진을 만난다는 것을 아니 이리 밤에 부른 것일 테다.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어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오늘따라 여기 독이 묻어 있을 것 같은지. 왕이 나를 총애한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잃을 것이 너무 커지고 소중해져서 그런지 일거수일투족에 살고자 하는 열망과 두려움이 따랐다.

 

‘그렇진 않사옵니다. 얼마 뒤면 한산하에 다다른다는 것이 소인을 들뜨게 할 뿐입니다.’

‘그것은 과인도 기쁘게 생각하오. 다른 장군들도 어디 손색 하나 없는 훌륭한 장수들이지만 이 장군이 없었다면… 진즉 후퇴해 지금쯤 땅 끝에 몰렸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소.’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요즘 곁에 가까이 하는 그 자는 믿을 만한 자요?’

 

현진을 말하는 건가.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저 서라벌의 천민 출신인 것을… 왕이 이렇게 나서서 의심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모두가 저와 현진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지위가 높은 자들이니, 저처럼 목숨 잃는 게 두려운 자들 투성이니 곁에 있는 사람과 또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의심하는 게 마땅한 법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렇게 대단한 자가 아닙니다. 연희패의 일부일 뿐이지요.’

‘연희패의 조무래기를 왜 자꾸 곁에 두냐, 과인의 말은 이 뜻입니다 장군.’

‘…….’

 

그럼 조무래기를 곁에 두지 장군끼리 밤에 만나는 게 더 징그럽지 않나… 생각하다 임금의 심기를 거스르는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얼른 답했다.

 

‘그가 가진 재주가 흥미로워 구경을 했을 뿐입니다. 연희패의 덜미이지 않습니까. 소인은 요 근래 몸이 좋지 않아 연희에 가지 못하고, 그 자도 마찬가지니 제게 놀이를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그 놀이가 정을 통하는 것이라면 과인은 그저 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말입니다.’

‘…….’

‘어떻게 생각하시오?’

“어떠셨어요?”

 

현진은 흡족한 얼굴로 전시장을 나와 민호에게 물었다. 어떻다 하기엔 아는 그림들이고 사실. 실제로 본다고 그게 더 예뻐 보이진 않으니까… 민호는 차라리 이름 모를 화가더라도 저 그림들을 모작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 쪽에 더 흥미가 있을지도 몰랐다.

 

“정말 멋진 전시였어.”

“거짓말. 동태눈깔 하신 거 다 봤는데.”

“무슨 소리야. 안 보여? 이 초롱초롱한 눈빛.”

 

눈을 부릅뜨자 현진이 어우… 하며 뒤로 물러난다. 내 눈이 뭐가 어때서.

 

“너 어떻게 알았냐.”

“뭐를요?”

“뭐긴. 내가 너 살려준 거.”

“기억이 나던데요?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아니 그리고 일단 어떻게 살린 건지가. 편의점 사장 하면서 갤러리 관장 하는 초능력자는 역시 다른가.”

“음 맞아. 초능력이지.”

“말은 잘해요.”

 

말이라도 잘해야 미술 잘 몰라도 관장 하지. 아니 진짜 어떻게 한 거냐니까요? 포켓몬 좀 열심히 키웠어. 됐니? 실랑이를 벌이며 경복궁 돌담길을 걸었다. 여기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 있지 않나. 그건 덕수궁 아닌가? 아 창경궁이었나? 궁은 왜 이렇게 많은 거예요? 야 세월이 몇 년인데 궁이 하나면 공사할 때 어디서 임시로 살아. 오… 논리적이다.

 

“그래서 관장님이랑 저는 사귀는 거예요?”

“아?”

“왜 갑자기 실언? 그냥 궁금해서…”

“그럼 안 되지. 너 막 회사 들어왔는데 나랑 사귀면….”

“관장님 허락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얘가 왜이래. 모네 보더니 돌았나.”

“…모네랑 뭔 상관. 고백이잖아요. 바본가. 싫음 말아요.”

“아니 싫진 않고. 따지자면 좋은 편이야. 좋은 편인데.”

 

그 말에 현진이 활짝 웃는다. 그럼 만나요 저희. 요즘 애들이란…

 

사실 첫번째 생애 이후로 현진과 제대로 연애라는 행각을 해본 적이 없다. 현진이 저를 늘 사랑하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온 적도 없었고, 제 정체를 들킨 적도 없었다. 왜 이렇게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거지. 이렇게 현진이랑 마지막 생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는 건가. 벌이 드디어 끝나나. 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이미 현진이를 두 번이나 되살려버린 건. 그 일에 대한 대가는 어떻게 치러야 하는 거지.

 

‘이제 전쟁을 그만 끝내시면 안되겠습니까?’

 

사상자가 가장 많이 나왔던 날이다. 한산하 유역에 거의 다다르자 적군의 저항이 거세진 탓이었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한 자의 방심과, 궁지에 몰린 자들의 전투력 차이는 예상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서라벌군의 거처가 불타고 병사들이 죽어났다. 민호의 첫 패전이었다. 몸 군데군데 큰 부상을 입은 채로 돌아와 얼기설기 만든 처소에 겨우겨우 몸을 눕혔을 때, 현진이 처소 안으로 들어섰다. 울음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현진이 살아있다는 게 너무나도 기쁜데, 현진은 제가 살아있는 걸 보고도 오히려 슬퍼 보여 이상했다.

 

‘저희 꼭두쇠가 오늘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래서였구나.

 

‘그만 멈추시면 안되겠습니까?’

‘……’

‘저는 더…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

‘같이 서라벌로 돌아가요. 장군.’

‘현진아.’

‘…….’

‘이제 거의 다 왔다.’

‘…….’

‘전하께서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어.’

‘…….’

‘이대로 돌아가면 너와 나를 반역자라 여길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는 현진을 끌어안았다. 장작이 불에 타오르는 소리. 불을 뒤로하고 어둠에 잠긴 황현진. 둘러싼 모든 것이 초라했다. 돌아가고 싶다. 너무나도. 전쟁에 모든 걸 바쳤어야 했나. 아니면 애초에 시작을 말고 다른 곳에서 너를 만났어야 했나.

 

서라벌에서 충원으로 후발대가 도착했다. 다시 출정하며 처소에 머무를 연희패에 섞여 있는 현진을 보았지만 부러 눈길을 주지 않았다. 따르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차순위라는 것을 새기며 오로지 전투에만 집중했다. 이 땅의 가운데를 길게 관통하는 강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인민들은 모두 피난을 가고 군대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지 말자. 죽지 말자. 검을 빼들며 현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 밤 아래 언덕에서 현진과 누울 수 있도록.

 

‘…….’

‘장군, 다치신 곳은 괜찮으십니까.’

‘어어. 연희패 아이가 줬던 약초가 아주 잘 들더구나.’

 

닷새 가량을 꼬박 싸웠다. 시신을 태우는 불길이 곳곳에서 솟고 다시 해가 뜨고 있었다. 병사가 다가와 물이 담긴 나무통을 건넸다. 마음 같아선 얼굴에 쏟아 붓고 싶다. 강을 점령하기 위해 전투했는데 물을 아껴 마셔야 한다니. 곧 현진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이걸 마실 수가 없어 손바닥에 덜어낸 뒤 얼굴을 닦아냈다.

 

전투는 성공적이었다. 현진에게 야멸찼던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왕이 그렇게 경계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일등공신이 한눈을 판다면 군대가 얼마나 위험에 처할지 모를 일이니까.

 

승전 소식을 듣고 늦게 처소에서 전진해 온 왕과 신하들이 병사들을 다독였다. 죽령길을 튼 것에 이어 한산하를 점령한 것이 서라벌 최고의 업적으로 남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시든지 말든지… 현진과 서라벌로 돌아가면 무엇부터 할지가 고민이었다. 우선 형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고, 현진과 함께 생활할 은신처를 마련해야 하고… 꽃놀이도 눈싸움도 할 수 있겠다. 그러고보니 현진이는 어디 있지. 임금의 뒤에 서서 물끄러미 군중을 훑던 민호는 저 뒤쪽에 손이 묶인 채 서있는 현진을 발견했다. 계속 일장연설을 해대던 임금이 저를 돌아본 것도 그 때였다.

 

‘그리고 이 장군.’

 

저 아이가 왜…

 

‘어쩌다 반역자가 되셨소.’

“관장님.”

“어.”

“혹시… 오늘 자고 가도 돼요?”

“…너 진짜 쉽지 않다. 그래도 되긴 하는데. 원래 이렇게 진도 빨리 빼?”

“아 무슨 생각 해요. 고모가 언제 올지 몰라서 그래요.”

“그래. 자고 가.”

 

애인한테 은밀한 시그널을 보내는 게 아니라 꼭 엄마한테 외박 허락 받는 것 같아서 어쩐지 이상했다. 태어날 거면 현진이만 다시 태어나지 꼭 저런 불결한 부속품들이 달려 나와서. 전생에도 전전생에도 그랬다. 현진이 제 집에서 지낸다면 민호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 고모랑 고모부는 진짜 어떻게 손을 봐야 하지. 어디서 사신을 섭외해야 하나…

 

민호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현진은 계속 창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바깥 구경하는 거 참 좋아하네. 그렇게 말했더니 어차피 멀미가 심해서 휴대폰 보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밤의 감성이 있잖아요.”

“…….”

“관장님은 감성 없어서 그런 것도 모르죠? 삭막해 정말.”

“나도 알아. 밤하늘 예쁘잖아. 그치?”

“와 잘 지어낸다.”

“세상은 원래 구라로 벌어먹는 거야.”

 

현진이 키득거렸다. 뭘 해도 웃어주니 좋다. 한강은 이천 년을 다녀도 마찬가지로 아름답다. 빌딩도 아파트도 아무것도 없던 시절을 알아서 그런가. 인민들을 몰아냈던 기억이 나 죄스러우면서도 현진과 제가 죽었던 장소라 마음 아프기도 또 하도 다녀서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애증은 몇 번을 견뎌도 참 어렵다.

 

‘소인이 자결할 터이니 저 아이는 살려주시지요.’

‘장군. 어찌 그리한단 말이십니까. 일족을 멸해야 하거늘 전하의 성은인 것을요.’

 

옆에 있던 장군이 빈정댔다. 이게 무슨…… 뒤에서 저를 포박하는 손길에 끌려 나와 무릎을 꿇었다. 내가 속았구나. 왕은 진작부터 보고 있고 알고 있었구나. 내가 충성하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의 능력으로 간과하고 있는 점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장수여도 충성하지 않는 자라면 곁에 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진작에… 나를 미워하지 그러셨소.’

 

난 이제 저 아이와 같이 살아갈 날만 남았는데. 현진을 끌어내는 무리가 저 안에서 헤치고 나와 민호 앞에 현진을 무릎꿇렸다. 무릎이 짓이겨지는 것을 보며 민호는 현진을 불렀다.

 

‘…현진아.’

“어, 관장님. 저거….”

“역주행인가 보네.”

 

강변북로에서 역주행이 웬 말이야. 그런데 순간 눈앞이 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무슨 헤드라이트가 저렇게… 섬광탄처럼 밝아.

 

“…관장님.”

 

저게 헤드라이트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뭐란 말인가. 이번에는 저것이 현진과 저를 함께 노리고 있었다. 한 번도 이럴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다니. 여기 행복하게 소원을 이룩하고 있다 광고를 하면서 불화살이 날아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다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이번 생에는 이 영원을 끝내겠노라 생각했지만 순탄치 못했다. 전과 달리 현진이 너무 갑작스레 죽을 위기에 놓였고, 당황한 탓에 현진을 해선 안 되는 방법으로 두 번이나 되살렸다. 원래는 편의점 주인 노릇을 하며 더 오래 지켜볼 생각이었다. 현진이 스스로 이룰 것을 다 이루고 나서 끼어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 번 그렇게 현진을 구해버리고 나니 그 다음부턴 또 다음 단계들의 연속이었다. 이럴 바엔 대놓고 도와주자. 그게 결국 벌의 끝으로 민호를 데려다 줬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건 소원이자 벌이었다. 현진도 살아가고, 저도 적멸하게 되었으니 저의 업보도 월로의 상벌도 이걸로 끝인 것이다.

 

벌을 끝내는 방법이 나 또한 똑같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니. 신들은 너무 고지식해서 오히려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영혼들을 벌한다.

 

핸들을 꺾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현진의 목숨을 노리는 칼들은, 화살들은, 차들은 어디서 이렇게 계속 날아오는 것인지. 그리고 이게 모두 내 소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인생이 어처구니가 없게 시작해 지긋지긋하게 끝난다. 그러는 이 순간에도 민호는 현진을 바라봤다.

 

“현진아.”

“…….”

“사랑해.”

“…….”

‘내 아이야.’

‘…….’

‘미안하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

‘장군이 제 처음이자 마지막 정인이십니다.’

‘…….’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 됐습니다.’

‘…….’

‘약조해주십시오.’

‘그러겠다. 다만.’

‘…….’

‘너 또한 그리 해야 할 것이다.’

 

현진이 웃었다. 그나마 마지막 얼굴이 웃는 얼굴이었다니. 그것도 잊고 나는 현진이 괴로웠을 거라 생각하며 지금까지 이렇게 허덕이고 있었구나. 민호의 얼굴로 일출이 내리쬐었다. 현진은 생각했다. 아름답다. 핏자국을 씻어낸 내 연인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리 하겠습니다.’

 

 

 

 

 

 

*

 

 

 

 

 

 

“이제 와 이리 네 소원을 놓게 된 계기가 뭔지 내도록 궁금하더구나.”

“…….”

“스스로 벌준 것이냐?”

“벌이라면 진작 주었지요. 월로께 제 소원을 말함으로써.”

“그럼?”

“놓아주고 싶어서요.”

 

무엇이 상이고 무엇이 벌이고 무엇이 사랑인지, 생은 왜 한 번 뿐인지 이제 알게 됐다.

 

“월로시여.”

“…….”

“이제는 그 아이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주십시오.”

“…….”

“저희 인연이 다했으니 그 애는 달리 살아갈 수 있다고.”

“…….”

“그 한 말씀만요.”

 

월로가 발 아래로 늘어뜨린 수염인지 실인지를 걷어 올리며 천천히 내려왔다. 파동도 없이 잔잔하다. 나는 수평선 너머로 가고 싶구나.

 

그래도 현진아.

너는 내가 태어나고 죽어 본 모든 생명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우니 우리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적멸하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영원에 머무르고 싶구나.

 

올림, 다시 월로전月老展에서.

 

 

 

 

 

 

 

 

 

흑석동에서 광화문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 걸렸다. 수직으로 타고 올라가는 한강대교 위에서 현진은 물의 파동을 봤다. 나만 있는 어디 동해 바다도 아니고 개나 소나 보는 한강의 일출이 대단히 특별할 건 없었지만… 꽝꽝 언 도로를 버스가 한참 기어가는 동안 물의 표면도 연속된 다리도 수평선처럼 보이는 먼 점도 눈동자로 덧그렸다.

 

출근해서는 점심시간에 근처 순대국집에서 직원들과 끼니를 챙기고 직장인들 바글거리는 동전만 한 테이크아웃 카페에서 산 삼천 오백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쭉쭉 빨아댔다. 현진 씨 아아야? 안 추워? 그러다 위장이 얼겠어. 호들갑을 떠는 실장과 직원들에게 머쓱하게 웃어주며 경복궁 돌담을 보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사는 거 재미 없다. 요즘 연애를 안 해서 그런가.

 

“현진 씨 그거 들으셨어요? 관장님 한국 오셨대요.”

“관장님이요?”

“저희 갤러리 관장님이요. 원래 네즈 미술관에서 큐레이터 하셨었잖아요. 이번에 그쪽에서 기획전 도와달라고 해서 잠깐 가셨었거든요. 뵌 적 없으시죠?”

 

국현이나 시립미술관 같은 규모 있는 전시장도 아닌데 관장을 코빼기도 볼 수 없는 게 의아하긴 했다. 똑같이 갤러리에 입사한 친구들은 하루가 머다하고 관장 욕을 하던데. 관장 만난 적이 없다는 현진의 말에 도장 깨기하러 떠나야겠다는 우스갯소리나 들었던 게 전부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포마드 헤어라니. 개코가 아니어도 삼십 미터 밖에서부터 맡을 수 있을 듯한 향수까지 뿌린 남자였다. 이런 사람이 관장이었구나… 관장은 현진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더니 언제부터 일했냐, 몇 살이냐 무슨 학교 나왔냐 꼬치꼬치 캐묻더니 퇴근할 때쯤이 되자 홍보팀에까지 행차해 현진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호감의 표시라는 걸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밖에 없었다.

 

“현진 씨.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요?”

“아, 아니요.”

“저랑 저녁 먹어요.”

 

벌써? 오늘 처음 봤는데? 이런 직진은 또 오랜만이라 만감이 교차하며 퇴근 후에 근처에 있는 이자카야로 끌려갔다. 회사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할지 참… 걱정은 됐지만 술이 유독 마시고 싶었던 날이라 상관은 없었다. 관장은 UCL로 유학 다녀온 얘기며 스물 네살에 결혼했다 이혼한 얘기며 자기 인생사를 한참이고 털어놨고 또 남의 말 흘려듣지 못하는 현진은 열심히 들어주었다. 제 얘기가 다 끝나고 나서야 관장이 현진에게 물었다.

 

“현진 씨는 연애는 자주 하세요?”

“아뇨.”

“왜요?”

“제가 예전에 시련을 좀 세게 겪어서… 트라우마 있다고 해야 하나.”

“몇 살 때였는데요?”

“스무살 때쯤요.”

“지금도 똑같아요? 세상에 사람도 많은데. 더 좋은 사람 나타날 수도 있고.”

“연애 하면… 주말에 좋아하는 사람 만날 수 있는 건 좋을 것 같아요. 그 때는 학교 다니느라 바빴어서 잘 못해주기도 했고.”

“저도 스무살 때 첫 애인 사귀었는데 엄청 좋아했어요. 그 때는 또 대부분 처음이니까 격하잖아요. 대신 죽어줄 수도 있을 것 같고. 물론 진짜 목에 칼 들어오면 그러진 못하겠죠.”

“그 정도였구나.”

“현진 씨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어요? 너무 몰입했나 내가.”

 

그런데 그렇게 아픈 기억이 있으면 상대방이 작정하고 상처를 줬나 보네. 관장이 괜히 거들었다. 나는 그보단 좋은 사람일거라는 기제가 깔려 있어 기분이 썩 좋지는 못했다. 의도가 뻔한 사람인 데다 상사다 보니 같이 있으며 기를 왕창 빨렸다. 빨리 튀어야겠다….

 

현진이 2차까지는 힘들 것 같다고 하자 관장이 같이 일어났다. 괜찮으면 다음에 또 둘이 한 잔 해요. 오늘 제가 같이 먹자고 한 이유는, 현진 씨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친해지고 싶어서였어요. 또 저렇게 단도직입적으로 호감을 표하니 거절하기가 뭣하다. 뭐 지금 당장은 좋지 않아도, 심지어 약간 별로여도 차츰 호감을 가질 수도 있을 테니까. 모든 관계에 가능성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말 많은 사람이랑 술 한참 마셨는데 버스 안 끊긴 건 용하다. 뒤쪽 자리에 앉아 술기운 때문에 무거운 머리를 차창에 기댔다. 노들섬 위를 지나가는 다리에서 밤의 색도 다채롭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그려나 볼까. 그래봤자 가로등색, 헤드라이트색, 아파트 조명색 일색이긴 했지만. 배경이 강이다보니 뭔들 아름다워 보였다. 시덥잖은 사랑 얘기를 해서 감성적인 것일 수도 있다. 왠지 외롭다. 목숨 바칠 사랑을 만나면 좀 덜하려나.

 

물결이 어둠 속에서 죽음처럼 고요했다. 엔진 소리밖에 나지 않은 버스 안에서 보이는 차창 밖의 먹먹한 파동이 그 잠깐 동안 혼자인 것을 잊게 만들었다. 그리워한 적 없는 아무나가 보고 싶다. 기억해야 할 것은 없는데 잊은 것은 많은 시대였다.

 

 

 

 

 

 

 

 

 

 

 

 

 

 

 

 

 

那將月老訟冥 來世夫妻易地爲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我此心悲

 

월하노인이시여 염라대왕께 소원 하나 빌어 주오

다음 세상에는 서로 바꿔 맺어지도록

천리 밖에서 내가 죽고 그대는 살아서 내 마음 그대가 알 수 있도록

 

배소만처상, 김정희